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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logos

백거이(白居易) 시 『이백의 묘지』

최종 수정일: 2022년 10월 26일

- 원전 백거이 시를 모르고 쓴 브레히트 시 『이백 묘지에 바침』



시인 李白 (이백)

브레히트는 친구 클라분트를 통해 이백이나 두보의 시 이외 시인들의 중국시를 접하고 읽었지만, 1918년에 남긴 4줄 시는 물론이고, 시인 이백 시라기 보다는 몇 번이나 유배 갔던 시인의 개인사에 대한 관심을 주로 자신의 글에서 묘사했다. 이런 글들을 통해 덴마크에 망명 중인 자기 자신, 즉 시적 자아를 표현하는 글들에 이백과 두보나 백거이를 끌어들이고 있다. 1934년경 브레히트는 망명지에서 『시인들의 이주 (Die Auswanderung der Dichter)』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호머는 집을 가지지 않았고 단테는 자기 집을 떠나야만 했다. 3천만 인구가 흩어져서 도망친 내란 내내 이태백과 두보는 방황했었다. 소송들로 에우리피데스는 위협을 받았고 죽어가는 셰익스피어를 입 다물게 했다. 프랑소와 비용을 여신만이 아니라 경찰도 찾았다 "정부 情夫"란 이름을 가진 루크레티우스는 망명했다 이렇게 하이네, 그리고 이렇게 브레히트도 덴마크 짚으로 인 지붕 아래로 도망갔었네.


(GBA 14, 256)


브레히트는 위 시에서 세계사와 문학사에서 망명길에 나섰거나 억압 받았던 유명 시인들을 차례차례 언급하면서, 당 현종 (玄宗)의 며느리이자 후궁인 양귀비 (楊貴妃)와 그녀 수양아들인 안록산 (安祿山)과 삼각관계의 사랑놀이 결과로 발생한 안사지란 (安史之亂)으로 당시 3천만 인구가 내란의 참상에 빠졌던 일로 방랑길에 나섰던 이백과 두보를 언급하고 있다. 동시에 시적 자아도 “이렇게 브레히트도 덴마크 짚으로 인 지붕 아래로 도망갔었네“라고 노래함으로써, 자신의 시에 동·서양 시인들과 공통점으로 시간적, 공간적으로 융합시킴으로써, 자기 자신도 세계 문학사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추방당한 시인“으로서 영광스러운 반열에 스스로 추가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1942년 3월에 뉴욕에서 망명중이며 덴마크 망명 시절에 아낌없이 도움 주었던 여류작가 미하엘리스 (Karin Michaelis, 1872-1950)의 70회 생일을 기해 보낸 편지에서도 "내가 듣기로 중국의 시인과 철학자들은 우리의 시인과 철학자들이 학술원에 가는 것처럼 망명을 가곤 했다. 이런 일이 보통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고국의 먼지를 신발에서 털어 내야만 한다고 쓰인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여러 번 망명길에 올랐지만, 다들 망명을 영광스런 일로 여겼다"[1]고 언급한다. 이 편지글에서 브레히트는 히틀러의 광기 아래 수많은 유럽 지식인들의 망명을 '고달프고 힘든 일 보다는 영광스럽게 생각하자'고 강조함과 동시에 브레히트 자신이 어떻게 중국 유명 시인들인 이백, 두보를 “추방된 시인들“ 그룹에 포함시켜 동지로 생각하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

결국 브레히트는 안록산 난에서도 수많은 시들을 후대에 남긴 당나라 시인들까지 동원하며 히틀러 광기 아래 망명에 나선 유럽 시인들이나 지식인들에게 계속 글을 쓰도록 고무하는 동시에, 파시즘에 맞선 힘든 투쟁에서 승리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있다.


그런데 1947년 미국에서 갑자기 이백의 시 번안도 아니고, 이백 시인 묘지에 대한 번안시를 쓴다. 그것도 참고한 원전도 남기지 않고 단지 “알프레드 브러시에 따라“라고만 밝히고 있다. 브레히트가 말하고 있는 브러시 (Afred Brush)의 해당 시가 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2]원전을 확인할 방법도 실상 없다.

브레히트가 브러시라고 말한 젊은 시인의 본명이 알베르트 브러시 (Albert Brush)로, 브레히트는 이미 1945년 12월 1일자 『작업일지』에서 이 시인을 언급하고 있다.[3] 브러시는 찰스 로턴 (Charles Laughton, 1899-1962)의 지인으로 『갈릴레오 (Galileo)』 미국 공연에 참여해 유랑가수 노래 등을 영어로 매끄럽게 표현하는 일을 도왔다. 그렇기 때문에 1947년 7월 30일에 있었던 공연 팜플릿에 노래 가사 번역자로 브러시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4] 즉, 1945년 12월 1일 『갈릴레오』 영어 대본이 완성되어 아이슬러, 포이히터방어 등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낭독할 때, 브러시도 동석했다. 이런 인연으로 아마도 해당 시를 브레히트에게 보여준 것을 브레히트가 독어로 번안한 듯하다.


브러시 첫시집 (1925)


하지만 브레히트가 어떤 원전을 사용했는지 전혀 확인할 길이 없으며 몇몇 중국 시어를 암시하는 시어들 (사찰, 떡, 두루미 등) 이외는 시 내용 자체에서는 중국시와 직접 관련되는 특별한 점을 확인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시인 브러시가 자유롭게 쓴 시룰 번안했다기 보다는 브레히트 식으로 쓴 전형적인 중국시라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왜냐하면 소년시절 1918년에도 이백의 언어 능력을 가지고도 원전과 관련이 전혀 없는 중국풍의 시를 쓴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브레히트가 다른 작가들 시를 개작이나 번안할 때는 반드시 원전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사용한 원전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어찌했건 브레히트 자신이 밝히고 있는 대로, 1947년 『갈릴레오』 공연 연습이 한창일 때 브러시 시를 바탕으로 아래와 같은 시를 번안했다.


이백 묘지에 바침


내가 아직 살았을 때, 우리는 공원 외진 곳에 앉아 있었지

이것저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하지만 대부분 그대에 대해.

그대 내 손을 잡고 나를 숲속 사원으로 이끌었지.

우리가 제물을 가져다 바쳤던 곳으로, 대부분 그대 위해

저녁에 우리는 불 곁에 앉아

내가 그대에게 자두빵을 먹이면 그대는 노래 불렀지.

그런 후 나중에 우리는 달을 바라보며 누워

나는 시를 지었지. 대부분 그대에 대한.

새벽 여명이 다가왔고 두루미들 울었지

길쭉한 다리로 습지를 가로 지르며.

우리가 벚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실 때면

이웃들 왔지요. 대부분 그대께로

이제 나는 여기 누웠네. 불도 달도 더 이상 내게 닿지 않는 이곳에.

더 이상 학들 울음도, 그대 노래도 들을 수 없다네.

그대 내게 가져온 떡 한 조각도 없나요?


Für das Grab des Li Po


Als ich noch lebte, saßen wir in der Mulde im Park

Redend von dem und jenem, doch meistens von dir.

Du nahmst mich bei der Hand und führtest mich zu dem Tempel

im Gehölz

Wo wir Opfer darbrachten, meistens für dich.

An den Abenden saßen wir beim Feuer

Ich fütterte dich mit Pflaumenkuchen, du hast gesungen.

Später dann lagen wir, blickend nach dem Mond

Und ich machte Verse, meistens über dich.

Frühdämmerung kam und die Kraniche schrieen

Über die Marschen führend die länglichen Beine.

Wir nahmen den Tee unter dem Kirchbaum.

Dann kamen die Nachbarn, meistens zu dir.

Jetzt lieg ich hier, wo nicht Feuer noch Mond mich erreicht mehr.

Keinen Kranich kann ich mehr hören noch dein Singen auch.

Hast du keinen einzigen Reiskuchen, den du mir brächtest?


(GBA 15, 188 f. 1947년)


시의 제목이나 내용을 중국풍으로 덧입히기는 했지만, 문헌적으로 이백 시인이나 중국시와 특별한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월리의 영역 시집 『중국시에서 번역들』에 수록된 볼드리지의 삽화나 그림들을 브레히트가 소위 “싸구려 중국풍“이라고 혹평하며 ‘종잇장으로 오려붙이고 시를 읽으니 시의 진가를 제대로 발견할 수 있었다‘[5]는 불과 몇 년 전 브레히트 자신의 알레르기 반응과 비교해 볼 때, 본 시의 번안은 다수 모순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브레히트는 브러시가 중국시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학자도 아니었으며 그의 시 내용이 문헌적으로 중국 한시와 전혀 관련 없이 단지 제목만 이백을 지칭하고 자유롭게 쓴 ‘문학적 중국풍‘을 추구한 영시란 것을 애초에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브러시 원시를 가지고 번안한 시라면, 아이러니하게도 브레히트 자신이 결국 “싸구려 중국풍 영시“를 독어로 번안한 셈이 된다.



비인 대학 중국학 교수, 보이취가 낸 백거이 시집 (라이프치히 1925년)


그런데 흥미롭게도 월리가 번역한 중국시집들 통해 브레히트가 망명시절에 백거이 시를 접하기 훨씬 이전, 즉 베를린에서 한창 활동하며 공자를 위시하여 동양 철학과 연극에 관심을 가졌던 1925년에 이미 백거이 시집 『중국 시인과 술꾼 (백거이)의 노래 (Lieder eines chinesischen Dichters und Trinkers, Po Chü-i)』가[6] 비인 대학 중국학 교수이던 보이취 (Leopold Woitsch, 1868-1939)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더군다나 이 시집에 『이백 묘지 (Li-Po’s Grab)』[7]란 시가 수록되어 있다. 보이취가 당시에 독어로 번역해 출간한 시 『이백의 묘지』의 독어 원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백의 묘지


채석강 강변에 이백의 무덤이 있지.

아, 단지 허물어진 봉만 남았네

끝없는 들판 풀섶 가운데,

그의 유골 안식처인가?

한때 그의 시에 경탄했다네.

하늘과 땅은 요동치고 감동했었지.

아, 얼마나 자주 시인은 가난으로 죽는단 말인가?

위대한 시인은 가난과 더불어 명을 달리했다네!


Li Po’s Grab


Bei Ts’ai-shih am Flusse liegt Li-Po’s Grab.

Ach! Ein verfallener Hügel nur,

Mitten im Grün endloser Felder,

Ist seiner Gebeine Ruhestätte

Einstmals staunten über sein Dichten

Bewegt, ergriffen, Himmel und Erde.

Ach, wie so oft stirbt ein Dichter in Armut.

Ein Großer ist mit ihm dahingegangen!


(보이취 교수의 번역, Woitsch 1925, 29쪽)



보이취 교수의 번역, Woitsch 1925, 29쪽


백거의 시인의 한시 원본과 한역된 시는 다음과 같다:


李白墓(이백묘) - 白居易 (백거이)


采石江邊李白墳 (채석강변이백분) 채석강 물가에 이태백이 묻혀 있고

繞田無限草連雲 (요전무한초연운) 무덤을 덮은 풀은 하늘에 닿을 듯 자라 있네.

可憐荒壟窮泉骨 (가련황롱궁천골) 가련타 무너진 무덤 속에 뼈만 남아 있겠지만

曾有驚天動地文 (증유경천동지문) 지난날 시 한 줄로 하늘과 땅을 울렸었지.

但是詩人多薄命 (단시시인다박명) 하지만 시인들 대다수가 박명했고

就中淪落不過君 (취중윤락불과군) 뜻을 잃고 떠도는 것도 그대 지나치지 않았네.

渚蘋溪藻猶堪薦 (저빈계조유감천) 물가에 있는 풀과 이끼 잘도 견뎌내는데

大雅遺風已不聞 (대아유풍이불문) 그 옛날 고상한 유풍을 더는 들을 수 없네.


브레히트가 1920년대에 이미 친구 클라분트를 통해 이백, 두보나 소동파 같은 다른 중국 시인들의 시를 다양하게 접했지만, 실제로 이 백거이 시인이 쓴 본 시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다. 보이취의 백거이 시집 출간 당시에는 브레히트는 동양시 보다는 서사극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동양극에서 서사극의 전형을 찾느라 분주했다. 그것도 1920년대 말에서야 월리의 일본 노극 영역을 하우프트만의 독역을 통해 처음 접했으므로[8], 망명 이전 독일에서 월리가 번역한 중국시를 번안하기에는 브레히트 자신의 역량이나 주위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지 않다면, 브레히트는 이미 20년대 독일에서 다양하게 번역, 번안된 중국시를 접하고 번안했을 것이다. 심지어 브레히트는 친구 클라분트가 이백 시를 번안한 『이태백 시. Li-Tai-Pe Gedicht』 (Leipzig, 1916)란 시집만으로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당시 베를린에서 하우프트만이 월리의 『중국시 170선』을 접했고 번역해 브레히트에게 보여줬을 것[9]이라는 가능성이나 추측 역시 원칙적으로 배제되어야 함이 타탕하다.




역주: [1] GBA 29, 224. [2] 브러시는 1925, 1938 그리고 1942년에 출간한 3권의 시집이 있지만, 브레히트가 언급하는 시가 이들 시집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3] GBA 27, 235. [4] GBA 5, 347. [5] GBA 27, 210 ff., (1944년), 주경민: 소네트로 읽어주는 브레히트 시와 시론. 서울 2022. 230쪽 그리고 본서 “미국에서 다시 백거이(白居易) 시집과 만남“이란 장을 참조할 것. [6] Leopold Woitsch: Lieder eines chinesischen Dichters und Trinkers (Po Chü-i). Leipzig 1925. 이 시집은 백거이 시인의 시만 72수가 번역되었다. [7] 같은 책 29쪽 [8] 이에 대해 필자의 책, “브레히트 서사극과 일본 고전극“ (서울 2019) 이나 “브레히트와 제아미 - 노(能)극 谷行“ (서울 2021) 참조 [9] 임한순은 한국브레히트학회에서 간행한 『브레히트 선집 5, 시』 (서울 2015)에서 중국시 생성사와 작품을 해설하면서 이렇게 추측하고 있다. 26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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