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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 시 『석가의 불타는 집에 대한 비유』에 나타난 동·서 문학 융합

최종 수정일: 4일 전

- 『삼거화택 (三車火宅) 비유』 아니면 『독화살의 비유』일까?



19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겔러롭의 불교 소설 『순례자 카마니타. 전설 소설』 (1907년)

브레히트는 소년시절 아버지로부터 뮌헨 뮐러 출판사에서 1912년부터 출간되는 모든 책을 선물 받았다. 앞서 이미 기술한 것처럼, 이들 책 중에 1913년에 출간한 마우트너 (Fritz Mautner, 1849-1923)의 소설 『가우타마 부다의 마지막 죽음 (Letzten Tod des Gautama Buddha)』을 통해 일찌감치 불교 핵심 개념인 ‘열반 Nirwana’을 알게 되었고 1917년에 이 개념을 사용하고 난 뒤에도 여러 곳에서 사용한다.

열반에 대한 관심은 1937년 덴마크 망명시절에 시 『불타는 집에 대한 석가의 비유』를 통해 브레히트자신이 이해한 열반의개념을 자신의 시에다석가의 비유와 함께구체적으로 융합시키고 있다. 브레히트가 시 제목에서 분명하게 밝히듯이 시의 내용은 석가의 비유 그것도 “불타는 집에 대한비유“를 말하고 있다. 브레히트가 시에서 소개하는 “불타는 집에 대한 비유“는 다음과 같다.


얼마 전 한 집을 보았지. 집은 활활 불타고 있었어. 지붕 위로

불길이 치솟아 올랐어. 거기로 다가가서 알게 되었지

아직도 집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재촉했지.

지붕에 불길이 솟아오르니 밖으로 빨리 나오도록 하시요!

하지만 집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 서둘지 않았어. 한 사람은 나에게 물었지

불기에 자기 눈썹이 벌써 그슬리는 순간에도

도대체 바깥은 어떠한지, 비가 오지는 않는지

혹 바람이 불지 않는지, 혹 다른 집에 불난 게 아닌지

그 외에도 여러 질문을 했어.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버렸지. 나는 생각했다네, 이들은

타죽고 말거야. 질문을 그치기 전에.[1]


이제까지 연구에서 이 비유를 브레히트가 겔러롭의 불교소설 『순례자 카마니타』의 『철없는 아이 (Das unvernünftige Kind)』란 장에서 기술된 ‘불타는 집에 대한 비유’를 출처로 삼았다고 연구자들이 주장해왔으며 새전집에서도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2] 겔러롭은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이 비유를 기술하고 있다.


이보게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저기 불타는 집 한 채가 있고 하인이 주인을 깨우기 위해 달려간다고 가정한다면. ‘주인나리, 일어나세요! 도망쳐요! 집이 활활 타고 있어요. 이미 대들보가 타고 지붕이 내려앉으려고 해요.’ 그러면 주인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겠지: ‘자네, 가서 밖에 비가 오고 폭풍이 부는지 아니면 아늑한 달밤인지 자세히 살펴보게나. 달이 밝다면, 우리 밖으로 나가세.’”

“사부님, 어떻게 주인이 그렇게 대답할 수가 있단 말이어요? 하인이 겁에 질려 ‘주인나리, 도망쳐요! 집이 불타고 있어요! 이미 대들보가 타고 지붕이 내려앉으려고 해요!’라고 소리 질렀는데 말입니다.[3]


그런데, 이 비유는 활활 불타고 있는 집에 대한 설정은 같지만, 『법화경 (法華經)』에 나오는 “삼거화택“의 비유와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삼거화택의 비유“는. 세상, 즉 사바세계는 불타는 집으로 비유하고 3승의 가르침으로 중생을 불길에서 구해내는 비유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가는 성문승 (聲聞乘), 연각승 (緣覺乘), 보살승 (菩薩乘)의 3승 (乘)을 구별해 가르쳤는데, 이 3승 모두가 부처가 되기 위한 수단, 즉 성불하기 위한 하나의 가르침 즉 1불승 (一佛乘)이다. 『법화경』의 유명한 일곱 가지 비유들 가운데 하나가 “화택의 비유 (火宅喩)“이다. 원래 『법화경』에 16가지의 비유가 있으며 이 비유들 중에 7가지가 잘 알려진 비유인데, ‘삼계화택유 (三界火宅喩)’[4]는 다음과 같다.


“어느 마을에 자식 많고 나이 많은 억만장자가 있었다. 그는 넓고 큰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은 이미 낡아서 폐가처럼 황폐해 있었다. 새들이 집을 짓고 있었으며 뱀들도 서식하고 있었다. 큰 저택이지만 무슨 까닭인지 출입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에 불이나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장자는 재빨리 문밖으로 뛰쳐나왔으나 그가 사랑하는 수많은 아이들은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집안에서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몸에 닥쳐오는 위험을 알지 못하므로 피할 마음도 없었다. 아버지인 장자의 마음은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위험하니 빨리 밖으로 나오너라’ 고 밖에서 크게 소리쳤으나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이 났다는 것이 무엇이며 불이 집을 태운다고 하는데 그 집이란 무엇인지, 또 불에 타서 죽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저 집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문밖의 아버지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장자인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아이들이 평소에 원했던 것을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너희들이 항상 원하던 양(羊)이 끄는 수레, 사슴(鹿)이 끄는 수레, 소(牛)가 끄는 수레가 문밖에 있으니 빨리 밖으로 나와라’고 소리쳤다. 장자는 비록 늙기는 했지만 힘이 있었기 때문에 힘을 써서 아이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오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와 소가 끄는 수레는 모두 아이들이 꿈에서나 그리던 것들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자 손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던지고 앞을 다투어, 오직 하나뿐인 좁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버지가 말한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는 그림자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무사한 모습을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으나 아이들은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다’며 막무가내로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약속한 양·사슴·소가 끄는 수레보다 더 크고 훌륭하며 날쌘, 흰 소(白牛)가 끄는 수레를 아이들에게 전부 나눠 주었으므로 아이들은 모두 만족했다.”


앞에서 소개한 세 가지 비유, 즉 브레히트 시에서 등장하는 비유, 겔러롭 소설에 나오는 비유와 『법화경』의 ‘삼계화택유 (三界火宅喩)’를 비교해보면, 비유들에서 설정된 “불타고 있는 집“은 같지만, 내용상으로는 석가가 설법한 ‘삼계화택유 (三界火宅喩)’와는 거리가 먼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석가가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불난 집” (세상) 안에서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놀기에 정신나간’ 아이들 (인간들)의 태도를 아버지가 구해내는 설정이다. 그런데, 겔러롭은 소설에서 장의 제목을 『철없는 아이 (Das unvernünftige Kind)』라고 붙이고 있지만, 실제는 주인과 하인 사이에 이야기다. 심지어 브레히트 시에서는 ‘집 안’과 ‘집 밖’에 있는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다.


겔러롭이나 마르트너가 소설 집필을 위해 참고했다는 올덴베르크 (Hermann Oldenberg, 1854-1920) 교수의 『석가. 생애와 가르침 (Buddha. sein Leben, seine Lehre, seine Gemeinde)』[5] 과 비인 대학 노이만 (Karl Eugen Neumann, 1865-1915) 교수의 책[6]에서는 정작 ‘삼계화택유 (三界火宅喩)’의 비유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열반과 관련해 석가가 “불구덩이 속 세상 (Die Welt in Flamme)“, “불구덩이 속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서는 도처에 발견된다.[7]


겔러롭, 특히 브레히트의 비유에서는 내용적으로 쓸데없는 질문을 배척하고 답하지 않는 관점에서는 석가가 어떤 질문들에 대해 답변이나 언급을 회피한 채 침묵을 지키는 무기 (無記, avyākṛta)와 비슷하다. 즉 ‘무기‘란 주로 ‘세계의 무한성과 유한성’, ‘영혼 혹은 생명과 신체의 동일성 여부’, ‘수행의 완성자인 여래 (如來)의 사후 존속 여부’ 등 본질적인 수행과 그다지 관계없거나 실존적인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별로 도움 되지 않는 질문들에 대해 침묵하는 태도를 말한다.

석가 제자 중에 하나인 만동자 (鬘童子, Mālunkya-putta)는 석가가 뛰어난 현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얻기 위해 석가의 제자가 되어 3가지 질문한 내용 중 하나인 “독화살의 비유“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중아함경 (中阿含經), 전유경 (箭喩經)』에서 기술되는 “독화살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어느날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말롱캬'라는 이가 있어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은 영원한 것인가, 영원하지 않은가? 우주는 무한한가, 무한하지 않은가? 영혼과 육체는 별개의 존재인가, 별개의 존재가 아닌가? 이런 것들은 커다란 의문인데도, 부처님은 평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이 없으시다.

오늘은 부처님께 이것을 여쭤보리라. 만일 이에 대해 대답을 못하신다면, 부처님을 비난하고 떠나가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말롱캬는 석가모니 부처에게 나아가 아까 생각한 문제들을 말씀드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부처님께서 이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주십시오. 만일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부처님 곁을 떠나겠습니다."

그 때 석가모니 부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롱캬여, 나는 네가 내 밑에 와서 수행하면 그런 문제를 말해 주겠다고 약속한 일이 없다. 온 것이 네 마음이었으니, 가는 것도 네 마음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알기 전에는 수행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문제를 알기 전에 수행을 해보도 못하고 너는 그냥 목숨을 마치리라.

그건 마치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순간에 그 친족들의 주선으로 달려온 의사가 그 화살을 뽑으려고 하자,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선 안 됩니다. 나는 먼저 이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활이 어떤 활이었고, 이 화살이 언제 누가 만든 것인지 알아야겠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이 화살에 손대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가 그것을 알기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서 죽고 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롱캬여, 세상이 영원하거나 말거나, 우주가 무한하거나 말거나, 생로병사와 근심걱정은 닥쳐오고 있지 않느냐? 내가 이런 문제에 대해 네게 말해준다 해도 네 의심이 그것으로 풀리지 않으리라. 지금은 그런 것을 말할 때가 아니다. 먼저 급한 것은 생로병사를 소멸하는 길이다. 어서 독화살을 뽑아내는 작업이다. 내가 너희에게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그것을 없애야 함을 알고, 그것을 없애는 길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8]


올덴베르크 교수는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질문의 거부 (Abweisung der Frage nach dem letzten Ziel)“ (315-317쪽)라는 단원에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앞에 소개한 『중아함경, 전유경』의 “독화살의 비유“와 올덴베르크 교수가 독역해 소개하는 비유와 내용적으로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따로 번역하지 않지만, 올덴베르크 교수가 이 비유를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질문의 거부“란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브레히트가 자신의 시에서 언급하고 있는 비유는 겔러롭의 소설에 등장하는 비유와 외형적으로 비슷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혀 다르며, 브레히트 시의 비유가 내용적으로는 “독화살의 비유“에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브레히트의 시 『불타는 집에 대한 석가의 비유』에서 브레히트가 말하고자 하는 중점은 “진정 친구들이여, 별로 할 말이 없네. (Wirklich Freunde / Nicht viel zu sagen haben“[9] 에 놓여있다. 즉 어떤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나 언급을 회피한 채로 침묵을 지키는 석가의 무기 (無記, avyākṛta)에 놓여 있는 점이다. 브레히트가 시 제목을 『불타는 집에 대한 석가의 비유』를 붙이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정작 “화택의 비유 (火宅喩)“가 아니라 “독화살의 비유“를 자신의 시에 융합하고 있으며 '형이상학적인 내용보다 '다급한 현실문제'를 빨리 자각하고 해결하라는 석가 가르침에 대헤서는 반 (안티테제)을 제시함으로써 이 비유를 자신의 시에 융합시키고 있다.


7쇄판으로 출간된 올덴베르크 교수의 『석가』 (Stuttgart, 1920년)

이런 관점에서 이제까지 브레히트 시 해설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왔던 겔러롭의 소설을 원전으로 보기보다는 브레히트 시 『불타는 집에 대한 석가의 비유』는 올덴베르크가 소개한 “독화살의 비유“를 원전으로 보는 게 훨씬 더 타탕할 것이다. 물론 브레히트는 이 비유를 1921년 마우트너의 소설 『가우타마 부다의 마지막 죽음』을 읽고 알았다. 왜냐하면, 마우트너도 이 비유를 자신의 소설 V장에서 짧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0]

결국 브레히트는 망명지에서 시 『불타는 집에 대한 석가의 비유』를 쓰면서, 소년시절 마우트너와 겔러롭의 소설을 읽었던 오랜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에다 우선 “불타는 집에 대한 비유“를 융합한 뒤에, 자기 시의 주된 시상과 주제는 석가의 무기 (無記, avyākṛta)에다 중점을 둔 올덴베르크가 소개한 “독화살의 비유“를 융합했다고 파악함이 훨씬 타당성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브레히트가 제목으로 택하고 있는 “불타는 집에 대한 비유“는 석가의 원비유와 너무나 동떨어진 비유가 되고 만다.





[1] GBA 12, 36. [2] GBA 12, 369. 1998년 필자의 논문에서 이 비유가 “화택의 비유“ 보다는 “독화살 비유“에 가깝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주경민: 브레히트와 석가.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1998. 122쪽. 또는 필자의 e북 "브레히트와 석가 - Brecht und Buddha". 서울 2019. 참조 [3] Gjellerup: S. 140. [4] 이 비유는 불교에서 장자화택 (長者火宅) 또는 삼거화택 (三車火宅), 삼계화택 (三界火宅) 등으로 불린다. [5] Hermann Oldenberg: Buddha, sein Leben, seine Lehre, seine Gemeinde. Stuttgart 1881. 이 책은 1920년대 이미 7판을 인쇄할 정도로 학문적으로 읽혀졌다. [6] Karl Eugen Neumann: Die Lieder der Mönche und Nonnen Gotamo Buddhos. München 1899 - Die Reden Gotamo Buddhos. München 1907 - Die letzten Tage Gotamo Buddhos. München 1911. [7] Oldenberg (1920) : 267쪽, 299쪽 참조. [8] 『중아함경 (中阿含經), 전유경 (箭喩經)』 [9] GBA 12, 37. [10] Mautner (1913): 56쪽.


(출처: 주경민, 『브레히트 동서문학 융합. 서울 2022, 19-27쪽. 본 내용은 브레히트 연구에서 처음 알려진 사실이므로, 인용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학술적으로 전남대 조길예 선생이 『독일문학 지』 (1997년 제 64집 159-185쪽)에다 발표한 "브레히트와 불교"란 논문에 안티테제로 필자가 브레히트 학회지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1998년 제 6집, 111-142쪽)에 발표한 "브레히트와 석가"란 논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논문들이 독일학자들이 많이 인용하고 있지만, 그 당시 브레히트 시가 "독화살 비유"에 더 가깝다고 이의를 제시했지만서도 근거를 밝히지 못했었다. 이번 『브레히트 동서문학 융합』에서 근거를 확실히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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