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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색한 표절 vs 당당한 번안 (뒤집기)

최종 수정일: 2022년 10월 2일

- 브레히트가 번안한 소동파 (蘇東坡) 시인의 『세아희작 洗兒戱作』


소동파 시인 (1036-1101)


국내에서는 일년이 넘도록 옹색한 표절 문제가 당당하게 시간끌며 진행중이다. 심지어 표절 문제를 심사해야하는 대학교수회의에서 다수결로 당당하게 결정하고선 “집단지성의 산물“로 “표절이 아니다“고 국민들에게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 공식적으로 알렸다. 이로써 여전히 표절 시비를 집단지성으로 방패막이하며 옹색한 모습으로 치닫고 있다. 굳이 집단지성 운운할 필요도 없이, 표절의 사전적 의미는 제3자의 창작물인 시, 글, 그림과 음악 등을 원저자 몰래 내지 출처를 전혀 밝히지 않고 몰래 빼끼거나 훔치는 도둑질을 표절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밝혀질 표절 문제를 가지고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경비나 힘을 낭비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앞에서 진하게 쓴 기준으로 초등학생들에게 맡겨도 결론은 쉽게 나올 것이다. 굳이 대학교수들이 뻔뻔스레 그것도 집단적으로 ‘광란적 지성‘을 입에 담을 문제는 결코 아님은 분명하다.


언급한 옹색한 표절과 버금가는 당당한 번안을 살펴보기 위해 소동파 (蘇東坡, 蘇軾, 1036-1101) 시인의 『세아희작 洗兒戱作』 (아이를 씻기며 장난삼아 짓다)이란 시가 영어권과 독어권에서 어떻게 번역되고 번안되었는지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출처: https://www.fronteer.kr/hanpic/237


人皆養子望總名 (인개양자망총명) 남들은 다 자식이 총명하길 바라지만

我被總名誤一生 (아피총명오일생) 이 몸은 총명으로일생을마쳤으니

惟願孩兒愚且魯 (유원해아우차로) 오로지 이 아이가 어리석고 미련하여

無災無難到公卿 (무재무난도공경) 재난없이 공경(公卿)이르길 바라네.




영국 동양학자인 월리 (Arthur Waley, 1889-1966)가 1918년 『중국시 170선 A Hundred and Seventy Chinese Poems』을 펴내면서 이 시를 다음과 같이 영역했다.


Waley 영역: On the Birth of his Son


이 영역 시집을 접한 2명의 독일 시인들, 브레히트와 뵘이 이 시를 번안한다. 1928년 『중국 노래. 중국시 번안들 Lieder aus China. Nachdichtungen chinesischer Lyrik』 (München 1928)을 낸 시인 뵘 (Hans Böhm)인 이 시를 다음과 같이 번안했다.



Böhm 독어 번안시: Bei der Geburt seines Sohnes

소동파 (1036-1101)


그의 아들 출생에서


아이가 출생하면, 그렇게

총명해야 한다네, 그가 성공할 정도로

내 영리함은 깨버렸다네

내 행복을 단지 산산조각으로


그때문에 내 아들에게 바라지,

그가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모르길:

그러면 평화로운 삶의 왕관을 얻게되지

그리고 궁정 장관이 되길.


이 시집이 나온 10년 뒤, 클라분트 (Klabund, 1890-1928)를 통해 일찌기 이백과 두보 이외 중국시인들 시를 접했던 브레히트는 히틀러에게 쫓겨나 덴마크에서 망명중이던 1938년 월리의 시집을 구해 읽고서 백거이 (白居易) 시에 주로 관심을 가졌지만, 소동파의 이 시를 시인 뵘과 같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번안한다. 이 번안시와 함께 중국시 6편을 당시 모스크바에서 발간되던 망명잡지 『말』에다 발표한다.



23번째 『시도』 10권에 실린 시 (1951년)




그의 아들 출생에서


자식을 낳게 되면 가족들은

아기가 총명하길 바라지,

총명함으로 나는

전 인생을 망쳤지

난 바랄 수 밖에 없어: 내 아들이

무지하고 생각하기 싫은 자로

단지 알려지기를.

그러면 그는 조용한 삶을 살 것이네

내각 장관으로서.

소동파 (1036-1101)


영역자인 월리와는 달리, 한자는 물론 한시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브레히트나 뵘이 원작자인 시인 소동파의 이름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전혀 다른 두 시인들 시이자 옹색하고 악한 표절시가 됨은 물론 표절 시비에 말려들 것이다. 허나 한시 원전을 알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터라 정확하게 시제목은 밝히지 않았지만, 한시 원저자인 “소동파“를 밝힘으로써, 옹색하고 악한 “도둑님“에서 당당하고 선한 “번안 시인“이 된 것이다.


이런 브레히트가 1928년 번안극 『서푼짜리 오페라』로 대성공을 거두자, 당시 베를린은 물론, 독일 문학계나 연극계에서는 젊은 브레히트 희곡에 대해 표절 시비로 한창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추이를 지켜본 브레히트는 1929년 이런 시비에 맞서 뻔뻔하고 당당하게 “표절도 예술“이라고 응수한 적이 있다. 이 글을 필자가 소네트로 옮겨 쓴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술로서 표절에 대한 소네트

- 문학 작품에서 표절 문제에 대해 [2]


1. 개작이나 번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몽타주 가능성. 작가는 “작업 방식“에 일치하는 태도들 가장 오래 지양하지.)

이것은 상황에 대해 각각 적응을 지속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지.

태도표 (사적인 걸 교체 가능한), 너무 공통적인 소재가 아닌, 더 많은 태도들 말이다.


여기에 인용은 정상적으로 아주 높은 가치 있는 자리 차지한다.

그러므로 인용은 가장 중요한 문체의 특징이지.

인용가능성. “표절“ 찾아내게 하는 일은 여기서 예술을 의미하지.

이것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원작자“는 중요하지 않은 게야.

자신이 사라지는 동안

자신을 관철시키는 것이야.


개작에 성공한 작가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야.

즉 사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면



2. 두 가지 표현 방식들 - 인기 있고 인기 없는 게 있지.

직접 행하거나 법률이 적용하는 패거리 통해 지나가라!

작가는 여러 표현 방식, 목적에 부합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개성은 문체나 전형적이어야 할 자세에 놓여있는 게 아니지.


개성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목적에 부합하는 문체 다루는 힘에 있지.

자세는 이 대상에서, 또한 (목적 이외에) 질적으로 생겨난다.

크고 작은 목적, 크고 작은 대상, 자세는 크고 작음에 부합되게 선택되어야 한다.

자세가 특별한 것처럼, 그리고 심지어: 작가가 아닌 사물의 본성에 따라 선택되지.


문체를 발명하기 원하는 일은 유토피아적일 수 있는 게야.

작가는 문체를 발견해야만 하네.

우리는 징조를 이해해야만 하는 게야.


모든 면에서 일어나는 변혁 나타내는 징조 말이네.

적응하는 방향이 지지하는 그 곳에 말이야

사회적 상황에.


(2022년 6월에, 독일 검은숲 언저리에서)



어찌했건 시 전체에 흐르는 기본 시상은 분명 소동파 시인의 시상이다. 하지만, 이 시상을 가지고 다른 시어와 시적 자세로, 다른 문화권과 언어권에 원저자의 시상을 전달한 것이 바로 또 다른 창작이자 번안 시인들의 역할이자 능력이다. 이런 시작의 태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종종 "시詩뒤집기"를 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흔히 모방작이라 하지만,

"시詩뒤집기"는 다음과 같다:

옛 시형식을 가지고

현시대적 사건 내용을 담은 새로운 시를 쓰고는 제목 아래에다 아주 유명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죽은 작가의 이름을 적는다.

그리고 이미 죽은 그 작가의 이름 뒤에다

“따라서”를 삽입한다.


(KMJ, 2014)


이런 자세로 필자가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치오르는 변절로도“, 하이네 시인의 “벨사살 잔치“를 “궁정동 최후 만찬“으로, 브레히트의 “상인의 노래“를 “사대강의 노래“로 "시뒤집기"한 시들을 묶은 시집이 바로 『사대강의 노래』 (서울, 2019)이다.


어쩌면, 아직까지 시인들이 쓰지 않은 시상도 없고 더 이상 쓸 시상도 이제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끝없이 새로운 시를 쓰고, 스스로 창작한 시라고 주장들 한다. 알게 모르게 어디서 표절했을 법한 시어나 시상을 시인들은 자기가 창작한 것인양 착각하는 시를 구출하는 방법은 바로 원저자를 찾아 정확하게 밝히는 길 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에게처럼 “집단지성“이란 말까지 동원해, 부끄러움도 잊고 ‘표절‘을 ‘창작‘이라 기꺼이 변호해 줄 “논민대“ ‘집단 지성‘을 그대는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했건 소동파 시인의 시는 독일 현대 문학에 번안되어 한편 시로 자리잡았다. (2022년 가을 문턱에, 독일 칼스루에에서)



소동파 『세아희작 洗兒戱作』

[1] 주경민: 소네트로 읽어주는 브레히트 시와 시작론. 서울 2022. 46쪽 이하. [2] 이 소네트는 브레히트 “예술로서 표절 PLAGIAT ALS KUNST“란 글 (GBA 21. 318, 1929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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