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고르 시집으로 동양 사상과 연극, 첫 관문을 열다
스스로 “나는 시인이다“는 자부심으로 글쓰기를 즐기던 문학소년 브레히트는 고향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발간되던 일간신문 (ANN)[1]에다 오이겐 (Bertolt Eugen)이란 필명으로 공식적으로 처음 글을 발표하게 된 것은 16살 되던 1914년 8월 4일이다. 이렇게 신문에다 글을 게재하기 시작한 소년 브레히트는 인도 작가와 처음으로 접한 계기가 바로191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 1861-1941)의 시집 『정원사 (DER GÄRTNER)』에 대한 서평을 1914년 10월 9일자 신문에 발표한 일이다. 이 글이 브레히트가 동양 정신세계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 되었으며 또 처음으로 인도 문학과 관련된 “라빈드라드 타고르 『정원사』 (»DER GÄRTNER« VON RABINDRANATH TAGORE)“란 글이다. 브레히트가 고향에서 발간되는 일간지에 기고한 내용을 소네트로 옮겨 쓰면 다음과 같다.
타고르 『정원사』에 대한 소네트
- 노벨문학상 수상자 타고르에 관심 보인 소년 브레히트[2]
1
극동에서 가장 먼저 우리에게 도착한 이 시집은 불편한 시기에 전달된 것 같네.
이 시집은 바로 인도 시성의 사랑 노래 모음집인 『정원사』이지.
우리 현실과 아주 대조적인 모습인 감미로운 동양적 선율이
우리 시대 폭풍 교향곡 속에서, 요란한 놋쇠 부딪치는 리듬[3]에서 울려 나오네.
행복과 사랑을 노래하며 감탄하는 일이 우리에게
이 시대에 비본질적, 비현실적으로 다가오지.
고통을 한탄하며 슬피 우는 일이
너무 사소하며 슬퍼하기엔 너무 개인적일 수 있다네.
그리고 이제 이상하고 놀라운 일인 게야!
우리가 이 소리들에 기뻐하며 한탄하는 일은
심각한 시대 망각하며 투쟁과 불행 잊는 일은
놀랍고 이상한 일인 게야!
이 시집 낸 시인 타고르 손잡는 일은
화창한 평화의 나라로 들어가야만 하는 일은.
2
지금 우리를 사로잡는 자체가 인도 철학자이자 시인에게 성공한 일이
이 시인의 위대한 원숙미에 대한 증거라네.
대부분 개인적인 체험들 바탕으로 한 짧은 시들이라네.
시인은 자신 머리카락 센다는 걸 알아차리지.[4]
시인은 조개를 잡아 쓸데없는 걸로 멸시하는 임에게 가져다주지.
일상 체험과 이 사소한 체험은 시인에게 시 소재들 제공하네
체험이 놀라울 정도로 내밀하고 부드러운 시구가 된다네.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것에 가벼운 황금 터치가 시구들 위에 빛나지.
빛나는 순결의 기묘한 생각들 빛나고 있는 게야.
시인은 가시가 자신을 찌르는 꽃을 꺾는다.
꽃은 저녁에 시들지만 찔린 고통은 남아있는 게야.[5]
결코 시어들 결박하지 않는다.
그 어떤 법칙도, 운율도, 식별할 수 있는 리듬도
모두 산문인 것처럼 보인다.
3
하나 타고르 시는 목가적인 전원시 선율을 내고 있지.
부드럽게 떠다니며 빛나는 리듬 속에
신비한 가락의 박자에 따라 흔들린다네.
타고르가 말하고, 아니 노래하고, 아니 기도할 때 다음같이:
“그들은 양손에 바구니를 들고 왔다네
그들 양발은 장미처럼 붉었지.
여명의 이른 아침 빛살이 그들 이마에 아른거리지.“[6]
이때 운율 가진 시구보다 이 산문은 더 율동적으로 들린다네.
이렇게 에펜베르거가 모범적으로 번역해 볼프 출판사가 아름답게 장정한
시를 잘 아는 이들에게 아주 독특한 매력 제공한다.
노벨상 수상 시인 타고르 이 노래들은
인도에서 고상해 보이는, 탁월하고도 시대 초월한 정신적 증언일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순수한 경건의 시간들 제공하지 이 시들은
왜냐면 이들 노래에서 영원한 미(美)의 피리소리 울려나오기 때문이다.[7]
발라드와 소네트를 쓰던 소년 브레히트가 산문시로 구성된 타고르 시집 『정원사』를 읽고 받았던 인상이다. 막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시기에 독일 독자들에게 다가온 평화적 메시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브레히트에게 “운율 가진 시구보다 이 산문은 더 율동적으로“ 들린 타고르 시에서 인도적 신비감을 이 글에서 소개하고 있다.
1913년 타고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자 영어권은 물론 독일에서도 다양한 번역서들이 출간되었다. 1910년에 출간된 『기탄잘리 (Gitanjali)』가 『신에게 바치는 노래 (Sangesopfer)』로 그리고 『정원사』도 1914년 독역되었다. 브레히트가 아우크스부르크 일간지에 이 서평을 발표했고 제목을 시집 『정원사』에 대해 분명히 표기하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브레히트 새전집 (GBA) 해설은 두 시집을 뒤죽박죽 섞어 혼동시키고 있다. 연구자들이나 새전집 해설자들이 타고르 『정원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계속한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서를 출간하면서 타고르는 서문에다 “이 시집에 사랑시와 인생시 대부분은 종교적 시집 『기탄잘리』 이전에 쓴 시들이다“ (5쪽)라고 직접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타고르 두 시집은 서로 완전히 다른 시집이다.[8]
특기할 것은 타고르 시집 『정원사』에는 브레히트가 채 파악하지 못했지만 후일 그가 추구하던 서사적 인도 문학 (연극) 이론을 내포하고 있다. 이 시집은 우선 시집으로는 특이하고 낯선 형식과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1번 »정원사«와 85번 »그대는 누군가, 독자!«란 시이다.
1번시 »정원사«는 시라기 보다는 (시바)여왕과 신하가 나누는 전형적인 희곡 대화체이다. 밤늦게 등장한 여왕과 신하 사이 대화로 “이 늦은 시간에 무엇을 바라는가?“는 여왕 질문에 신하는 “여왕님 정원에 정원사가 되겠노라“고 답한다. 이에 여왕이 “그대는 내 정원에 정원사가 될 것이다“라며 신하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화로 1번시 »정원사«는 끝맺고 있다. 이 대화를 끝으로 바로 2번시 »시인이여, 저녁이 다가오네«란 시로 시적자아가 “나 ICH“로 시집 『정원사』 전체 시들을 노래하고 있다.
인도 고전 문학, 그것도 산스크리트 문학을 아는 사람은 이 첫 번째 시에서 타고르는 독자들에게 칼리 (Kali) 신의 시종 (Dasa)으로 부른, 즉 칼리 여신을 신실하게 시중든 결과로 “칼리다사 (Kalidasa)“라는 작가로서의 이름을 얻어 인도 “모든 시인들의 왕실 소유 보석“ (무쿠타라트남 mukutaratnam)이란 영광을 얻었던 『샤쿤탈라 (Sakuntala)』[9]의 저자를 떠올리게 된다. 즉 타고르는 자신의 시집 『정원사』를 노래하는 시인은 여왕 (시바)의 정원에서 일하는 정원사로, 시인으로서 노래함으로써, 칼리다사의 후예 시인으로 자처하고 있다.
더 나아가 1번시 »정원사«는 시집 『정원사』의 서막 (Pûrvarańga) 내지 프롤로그 (Prastâvanâ) 역할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도 문학(연극)이론에 해당하는 바하라타 무니의 『나트야사스트라 (Nâţyaśâstra)』에 따라 생각해 보면, 이 부분이 무대감독 역인 연출 (Sûtradhâra)이 여배우 (naţî)를 무대에 불러내는 프롤로그 (Prastâvanâ)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비록 희곡이 아닌 시집이지만, 신하의 청으로 (시바) 여왕이 신하에게 정원사로 임명하고 두 번째 시에서 바로 이 정원사가 주인공 시인으로 등장해 시적자아로 전체 시를 노래하고 있다. 즉 1번 시는 시집 자체에서 낯선 대화체이자, 서사적 요소인 셈이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85번 시, »그대는 누군가, 독자!«란 시도 서사적 요소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집 전체에서 시적 자아로 노래하다 마지막에 독자들에게 서사적 자아로 마지막 시에서 다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바로 산스크리트극에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막간극이나 후막 형식이자, 에필로그로 서사적 기법이다.
많은 해설자들이 100년 뒤 독자들에게 말을 거는 사실에 감탄하는 85번째 마지막 시 “그대는 누군가, 독자여!“ (176쪽)는 에필로그, 즉 에피그램에 해당한다. 즉 『정원사』는 서시와 에피그램과 83개 시들로 구성된, 산스크리트극 서사적 형식[10]을 본 시집 자체에 포함하고 있다. 타고르는 다음과 같이 시집을 마감하고 있다.
그대는 누구인가, 독자여!
백 년 지난 오늘에 내 시를 읽게 될 독자여,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그대에게 이 봄날 풍성한 한 송이 꽃, 저 하늘 구름에서 한 줄기 황금 햇살도 보낼 수 없지.
그대 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시게!
그대 꽃피는 정원에서 사라져버린 백년 전 꽃들 향기로운 추억들 꺾으시지!
그대 마음에 기쁨 속에 어느 봄날 아침 노래했고 백년 넘게 이들 기쁜 음성을 보냈던 생생한 기쁨을 그대는 느낄 수 있을 것이네.[11]
물론, 이 당시 발라드를 쓰던 소년 브레히트가 타고르 시집 서평을 쓰면서 서사극 형식까지 이미 간파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브레히트 자신이 인도 문학을 처음 대하면서 이런 서사적 기법을 타고르 시집에서 이미 만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후일 자신이 끝없이 추구하며 찾고자 나선 서사적 형식과 기법에 대한 단서를 타고르 시집에서 이미 접했기 때문이다.
인도 문학, 특히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와 첫 인연을 맺은 브레히트의 관심은 지속된다. 즉 1920년 같은 출판사에서 타고르 소설 『집과 세계 (Das Heim und die Welt)』을 출간되자, 브레히트는 이 소설을 읽는다고 자신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12]
[1] 아우크스부르크 최신 기사 (Augsburger Neueste Nachrichten)의 약자.
[2] 이 소네트는 브레히트 글 “»DER GÄRTNER« VON RABINDRANATH TAGORE“ (GBA 21. 33 f., 1914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3] 제1차 세계대전 (1914-1918년)이 일어났던 해에 발간된 타고르 시집에 대한 비판적 논조.
[4]RABINDRANATH TAGORE: 『정원사』 »DER GÄRTNER« 뮌헨 1914년. 첫 번째 시, 11쪽 비교.
[5] 타고르 56번째 시, 122쪽.
[6] 타고르 4번째 시, 15쪽
[7] 주경민: 소네트로 읽어주는 브레히트 시와 시론, 서울 2022. 18쪽 이하.
[8] 비교, GBA 21, 600쪽과 이승진: 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서울 1997. 241쪽
[9] 주경민 역: 칼리다사 - 샤쿤탈라. 서울 2020과 주경민: 칼리다사와 샤쿤탈라. 서울 2021.
[10] 참조, 주경민: 브레히트 현대 서사극과 칼리다사 『샤쿤탈라』 (서울, 2020)와 주경민 역: 칼리다사. 샤쿤탈라. (서울 2022).
[11] 타고르. 정원사, 85번째 시, 176쪽.
[12] 브레히트 1920년 8월 25일자 일기. GBA 26,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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