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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다사에서 브레히트까지 샤쿤탈라『Śakuntalâ』

최종 수정일: 2020년 10월 16일

브레히트 서사극에 감추인 흔적 - 칼리다사의 샤쿤탈라 『Śakuntalâ』




아시아 문학 중에서 서구 문학에 영향을 끼친 작품들을 찾아본다면, 인도 『산스크리트』극인 칼리다사의 샤쿤탈라 『Śakuntalâ』만큼 서구문학, 특히 희곡과 연극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Śakuntalâ』의 저자 칼리다사 Kâlidâsa는 아직까지 산스크리트 문학 연구가들 사이에 서로 약간의 견해차가 있지만, 3-5 세기경 굽타왕조 왕실가의 한사람으로 보는 것이 정설인 것 같다. 그런데, 서구에 번역되어 잘 알려진 칼리다사의 작품은 『왕과 무녀 Der König und Tänzerin』, 『Śakuntalâ』, 『우르바시 Urvasi』등 3 개 희곡과 구름사자에 관한 서사시의 하나인 『매가 두타 Megha Dutha』를 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당시 인도 벵갈 재판소의 주임 법관이자 아시아 문화를 서구사회에 소개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던 존스 William Jones 卿이 1788년 『Śakuntalâ』를 번역함으로써 획기적인 기회가 된 것이다. 이 번역을 통해 『Śakuntalâ』는 괴테, 쉴러에게는 물론 쉴레겔과 헤르드 등 독일 문학과 정신계에 깊이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유럽 각개 국어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외에도 『Śakuntalâ』는 현대연극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이 글을 통해 『Śakuntalâ』가 특히 독일 문학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옛 것을 배워 새것을 안다 溫古以知新”는 진리를 새삼 음미해 보고자 한다. 

   존스 William Jones 경이 1788년 8월 17일 『Śakuntalâ』번역을 마치고, 이듬해인 1789년 켈커타에서 『Sakontalá or the Fatal Ring. An Indian drama by Cálidás』란 제목으로 발간했다. 이것이 1790년 다시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1790년 5-6월 런던을 여행하던 포르스터 Georg Forster의 손에 들어가 독일로 입수되었고, 포르스트가 독어로 번역함으로써 『Śakuntalâ』는 칼리다사에 의해서 쓰여진지 1500 년이 지난 뒤에 유럽문학에 그 영향력을 나타내게 된다.


Goerg Forste
포르스터 Johann Goerg Forster (1754-1794)

    젊은 포르스터는 이미 1773년 타히티 섬 여행에서 “인간이 물욕을 가지지 않는다면, 인간의 본성 그 자체는 선한 것이며 그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표상을 얻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자연적으로 인도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당시 인도 켈커타 총독이었던 하스팅 Warren Hasting과 접촉하고자 많은 노력을 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런던 여행을 하던 포르스터는 존스의 『Śakuntalâ』영역본을 접하게 되었고, 이 책을 읽은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포르스터는 『Śakuntalâ』를 읽고 난 뒤, 곧 바로 3막 2-3장 Duschmanta 왕과 Sakontala 사이에 사랑에 빠진 장면을 번역해, 마인츠에 있는 친구 후버 Ludwig Ferdinand Huber에게 보냈다. 이 번역을 당시 쉴러 Friedrich Schiller가 펴내던 잡지「탈리아 Thalia」에다 시험삼아 게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스페너 Johann K. P. Spener에게 보낸 편지,  1790년 7월 23일) 후버는 즉시 이것을 쉴러에게 보냈고, 쉴러는 1790년 여름호 (10. Heft, Leipzig 1790. S. 72-88)에다『Scene aus dem Sacontala oder dem unglücklichen Ring, einem indischen, 2000 Jahr alten Drama』란 표제로 게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쉴러는「탈리아」誌에다 번역자 포르스터는 물론 영역한존스와 저자 칼리다사의 이름을 빼고 게재를 했다.

    1790년 8월 20일 편지에서 포르스터는 쉴러에게 “「탈리아」誌에다 『Śakuntalâ』의 저자를 즉시 추가해 출간할 것과 자신이 보낸 친필 번역본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어찌했건 포르스터의 『Śakuntalâ』부분 번역이「탈리아」誌에다 실려짐으로써 독일 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래서, 포르스터는 영국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Śakuntalâ』완역과 아울러 출판 계획에 착수하게 된다.


Duschmanta 왕과 Śakuntalâ와의 첫 상봉 장면 (힌두원고 1789년)

    포르스터는 친구 후버의 도움을 얻어 1970년 8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Śakuntalâ』를 완역한다. 번역 중에도 계속해서 포르스터는 『Śakuntalâ』를 출판해 줄 출판사를 찾고자 노력했지만, 옛 친구 스페너 이외에 특별한 출판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포르스터는 1790년 7월 23일 스페너에게 보낸 편지에 “영국에서 존스 경이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영역한 인도극 『Sacontalá or the fatal Ring』을 가져왔다네. 이 작품은 1900년 전에 유명한 인도 시인 칼리다사에 의해서 쓰여졌지. [...] 나는 이 작품을 친구인 후버와 함께 번역 중일세 자네가 이것을 출판해 보지 않으려나? 쉴러의「탈리아」誌에다 게재했던 것을 자네가 경험한 것 처럼, 이 작품이 아주 흥미를 돋굴 것은 확실할 것 일세”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페너는 포르스터의 『Śakuntalâ』번역본 출판을 망설이고 미루게 된다.     그러자, 포르스터는 1790년 8월 마인츠 한 젊은 출판업자 피셔 Johann Peter Fischer와『Śakuntalâ』의 출판 계약을 한다. 이렇게 해서 포르스터의 『Śakuntalâ』는 젊은 출판업자인 피셔에 의해 출판되어, 1791년 라이프찌히 도서출판쇼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된다. 

   포르스터는 이미 그의 “국지적 교육과 일반적 교육에 관해서 Über Lokale und allgemeine Bildung”(1791)란 논문에서 인도 문학에 대해서 잘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Śakuntalâ』의 출판은 세계 문학이 고전주의적 이념에 기여한 업적은 무엇보다도 큰 의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포르스터는 당시 독일에 『Śakuntalâ』를 보급하는 것을 독일 고전주의의 세계관에다 인도관을 추가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Śakuntalâ』가 출판되었던 1791년 5월 17일, 포르스터는 『Śakuntalâ』를 당시 문학계와 정신계를 이끌던 괴테 Goethe, 헤르더 Herder, 하이네 Heyne, 불루멘바흐 Blumenbach, 좀머링 Sömmerring, 달베르크 Dalberg, 리히텐베르크 Lichtenberg, 포스 Voss 등에게 직접 헌정했다.     이로 인해서 결국 독일 지성계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괴테와 쉴러의 인도극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겠고, 또 쉴레겔의 인도문학 전반에 대한 관심은, 1808년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처음으로 인도 문학과를 설립까지 하게 된다.

    이미 포르스터의 『Śakuntalâ』부분 번역을「탈리아」지에다 게재하여 독일 문학계에 소개를 했던 쉴러는 1790년 8월 23일 후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Sacontala는 이미 '탈리아지' 10 권에다 편집되어 인쇄되었네. 이 기고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네. 포르스터에게 내가 받은 인상을 아무리 말해도 모자랄 것일세”라면서 『Śakuntalâ』에서 받은 인상을 잘 피력하고 있다. 포르스터는 1791년 완역한『Śakuntalâ』를 직접 쉴러에게 보내주지 않았지만, 쉴러도 마찬가지로『Śakuntalâ』를 읽었으리라 짐작된다. 왜냐하면, 쉴러의『Thalia』誌를 펴내던 출판업자 괴센 Gerog Göschen에게 1790년 11월 28일에 보낸 편지에서 “자네가 Sacontala를 우리에게 한 권 보내 준다면 그것은 분명 아주 좋은 독서꺼리가 될 걸세.”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1795년 12월 17일 훔볼트 Wihelm von Humbolt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리스나 로마 고전에서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은 물론, 아름다운 여인상에 관한 시적인 묘사와 구상을 『Śakuntalâ』에서는 찾을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쉴레겔
쉴레겔이 하이델베르크 대학 인도문학과 설립을 기념해서 1808년『인도 언어와 지혜에 관해서』란 이름으로 편찬한 책의 표지

    하지만, 쉴러가 7년 후인 1802년 2월 20일 괴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Sacontala를 가지고 희곡을 써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시 Sacontala를 손에 잡았지만 우리의 연극을 위해서는 접합지가 못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쉴러가 『Śakuntalâ』를 소재로 창작한 것을 굳이 찾는다면, 서막이 끝나자마자 등장한 Duschmanta 왕이 부르는 노래를 소재로 1804년에 지은 『알프스 사냥군 Der Alpenjäger』이란 시뿐이다.

이러한 쉴러와는 달리 서구 문학계에 포르스터의 번역 『Śakuntalâ』를 널리 알려지게 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괴테와 헤르더의 공로가 크다. 헤르드는 포르스터의 『Śakuntalâ』번역을 1800, 1803년 계속해서 재출간함으로써, 인도 문학자들이 계속적으로 『Śakuntalâ』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음은 물론, 포르스터의 번역을 바탕으로 1792년에는 러시아말과 덴마크어로, 1793년에는 네덜란드어로, 1803년에는 프랑스어, 1815년에는 이탈리아어로 그리고 1861년에는 폴란드어로 각각 번역되도록 기여했다.     괴테는 포르스터의 번역 『Śakuntalâ』에 무엇보다도 자신이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1791년 5월 17일 포르스터가 보낸 『Śakuntalâ』를 받고서 어느 누구보다 먼저 포르스터에게 답장을 보낸다. 이 편지가 아쉽게도 분실되었지만, 포르스터는 편지 수령부에다 괴테가 5월 30일 보낸 것을 6월 2일 받은 것으로 적고 있다. 추측하건데, 편지의 내용에는『Śakuntalâ』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와 아울러 『Sakontalâ』라는 시를 동봉했을 것이다.

이른 봄에는 꽃을, 그리고 늦가을에는 과일을 얻고자 하면 매혹적이고도 황홀한 것, 포식할 만한 것 그리고 자양분을 원하면 또 땅덩어리를 한 이름으로 포용할 하늘을 보고 싶다면; 나는 그대에게 기꺼이 Sakontala를 권하고 싶다. 그 이외에는 난 그대에게 더 이상 권할 말이 없다네.


괴테는 이 시를 1791년 6월 1일 야콥 Friedrich Heinrich Jakobi에게 보낸 편지에도 동봉했으며, 같은 해 『Deutschen Monatsschrift』란 잡지 여름호 (264쪽)에도 발표했다. 괴테가 얼마나 이 인도극 『Śakuntalâ』에 감명을 받았고, 또 이것을 가지고 작업했는지는 그가 1791년 8월 22일 포르스터에게 “존스 경의 영역본『Sakontalá』를 빌려줄 것”을 요구했고, 포르스터가 1791년 9월 5일에 빌려준 영역본을 괴테는 10개월 뒤인 1792년 6월 25일에 되돌려 주면서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고 헤르드에게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괴테가 "샤쿤텔라"를 접촉한 이후 40 여년 동안 인도 산스크리트 극에 대한 감명을 괴테의 작품이나 글 등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Śakuntalâ』와 접촉은 괴테의 문학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괴테나 쉴러가 똑같이 “『Śakuntalâ』가 무대상연 효과를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지만, 괴테는 이미 1797년 자신의『파우스트 Faust』에다 『Śakuntalâ』에서 극적 요소를 도입하게 된다. 이것이 유명한 『극장에서의 서막 Vorspiel auf dem Theater』인데, 1851년 하이네 Heinrich Heine는 자신의 발레극 『파우스트 Der Doktor Faust』의 서문에 “괴테는 『파우스트』의 서막인 『극장에서의 서막 Vorspiel auf dem Theater』에다 『Śakuntalâ』의 서막 기법을 수용하고 있다”라고 제일 먼저 언급을 한다. 괴테는 물론 『Śakuntalâ』를 접하기 이전까지 개막기도에 이어서 무대감독이 등장하여 여배우와 함께 대화를 하거나, 작가와 함께 공연될 작품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인도 고전극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서막의 기능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Goethe 괴테, 칼리다사,
괴테가 1790년 미완성 작품의 출판 이후 계속해서 1796, 1797, 1800, 1801, 1806 그리고 1807년 수정을 해오다가 마침내 1808년에 2번째 개정판을 낸『파우스트』초판본

   『Śakuntalâ』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무대감독이 등장하여 시바 신에게 서막기도를 올린다. 이것은 인도극 자체가 며칠간 밤낮으로 이어지는 공연이고 일종의 축제와 제의적인 행사이므로 서막기도는 이러한 모든 행사를 신에게 바치는 의미와 아울러 아무런 탈없이 행사를 치루기 위한 일종의 제의 의식이다. 서막기도를 마친 후 무대감독은 등장해서 여배우를 불러 낸다. 이어서 그녀에게 오늘 칼리다사의 『Śakuntalâ』가 공연될 것이라고 알린다. 교양있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되므로 긴장되어 “현명한 관중들이 우리의 극적 재능을 흥미롭게 수용하는 한 나는 망설임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여배우에게 여름에 관한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연극을 시작하고 있다.

     이 서막을 가지고 괴테는 『파우스트 Faust』서막을 발전시켰다. 『파우스트』 서막에서 무대감독은 작가와 희극배우와 함께 등장하고 무대감독은 두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 관중들이 작품을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에 무대감독은 무엇을 해야할 지를 모르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관중들에 관한 한, 맨 먼저 아무 신경을 쓰지 않고 단지 미래만을 생각한다. 이에 반해서 희극배우는 뒤에 얻게 될 명성보다는 동시대 사회를 즐기고 그것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 무대감독은 굉장한 구경거리를 원하지만, 희극배우는 작가에게 “단지 모든 인간의 삶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가라”라고 조언한다. 또 “누구나가 그러한 삶을 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삶은 알려지지 않았다. 너희들이 삶을 알기 시작하는 그 시점에서 삶이란 것은 흥미로운 것이지”라고 말한다. 작가는 그 나름대로 “진실에 대한 궁핍과 사실 왜곡에 대한 유혹”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인도극 전통에 따라 짧은 서막을 통해 관객에게 작가와 작품의 이름,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함으로써 연극을 도입하게하는 칼리다사와는 달리 괴테는 『파우스트』서막에 세 등장 인물들이 등장해 우스꽝스런 대화로 예술의 심각한 문제를 토론하게 하고 있다. 『파우스트』나『Śakuntalâ』 서막을 비교해 볼 때, 두 서막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 극장에서 서로 상이하게 요구되는 완전히 다른 사회상을 두 서막은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극 서막의 기법을 괴테가 자신의 『파우스트』에 도입하여 발전시킨 것은 서구 연극을 위해서는 큰 수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괴테는 이어서 1813년 윌슨 Wilson이 영역한 칼리다사의 시집 『구름 사자 Meghaduta』를 알게 된다. 칼리다사는 이 시집에서 구름을 통해 정신계로부터 추방당한 혼백에게 고향에 있는 연인의 소식을 전해주게 하고 있다. 괴테는 이 시집을 읽고 이에 관해 『Zahmen Xenien』2집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칼리다사와 다른 시인들은 모든 것을 이루었다. 그들은 시인의 멋으로 우리를 성직자와 말괄량이들로부터 해방시켰다. 석수쟁이로만 머물 수 있다면, 나는 인도에서 살고 싶다. Sakontala에게, Nala에게 그리고 구름의 使者 Megha-Duta에게 입맞춤하는 것 말고 더 유쾌한 무엇을 알기를 원하랴! 마음이 통하는 사람에게 어느 누군들 기꺼이 가고 싶지 않으랴!

    이 구름 사자의 모티브를 괴테는 『파우스트』 2부에서 인조인간 호뭄쿨루스 Homumkulus가 헬레나가 막 태어나고 있는 아름다운 장면을 꿈꾸는 파우스트를 그리스로 데려간다. 이 때 파우스트를 비행하는 망또에다 태워서 그리스 텟살리아까지 데려가서 잠을 깨운다. 이 혼령의 여행은 Śakuntalâ』에서 Duschmanta 왕이 시바 신의 사자의 마차를 타고, 하늘을 날아 Sakuntala를 찾아가는 장면과 구름 사자인 Megha-Duta의 모티브를 괴테가 『파우스트』 2부에다 도입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포르스터가 번역한 『Śakuntalâ』와의 접촉은 괴테가 인도 문학과 정신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괴테의 문학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더나아가서 포르스터의 『Śakuntalâ』의 출간은 예나 Jena나 바이마르 Weimar에서 당시 문인들과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아니라, 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괴테 이후 인도 문학가들이 독일 연극 무대를 위해 수많은 번역과 번안을 시도하지만, 쉴러가 판단한 대로 한번도 무대 상연이 되지 않은 채로 20 세기까지 『Śakuntalâ』는 전해내려 온다. 이것이 1920년대 독일 연극계에 소위 “고전극 부흥”에 힘입어 다시 『Śakuntalâ』에 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전에 이미 수많은 번역이 있었지만, 1924년 라우크너 Rolf Laukner와 1925년 코른펠트 Paul Kornfeld가 각각 『Śakuntalâ』를 번역․번안해서 독일 무대에 올리게 된다.

    이 당시 『Śakuntalâ』공연을 브레히트가 접했던 것 같다. 브레히트는 1928년 『새로운 극작술에 관해서』란 글에서 “아이스킬로스 비극, 몰리에르 희극, 칼리다사의 『산스크리트』극 등 모든 가능한 연극 양식들을 동원해서 근원적으로 효과있는 새로운 극작술, 즉 서사극을 창출하는데 이용할 수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브레히트가 칼리다사의 『Śakuntalâ』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다.

    브레히트가 그의 유고 도서관에 남긴 켈러너 Hermann Camillo Kellner가 1890년 번역한 칼리다사의 『Śakuntalâ』와 1894년 번역한 슈드라카 Sûdraka의 『Vasantasênâ』이외에도 포이히트방어의 번안극 슈트라카의 『Vasantasênâ』(1916)와 칼리다사의 『왕과 무희 Der König und die Tänzerin』(1917)을 통해 일찍이 인도극과 접했음을 알 수 있다.     브레히트가 『산스크리트』극에서 자신의 『서사극』발전에 사용한 기법을 찾아본다면, 1934년 스테핀 Margarete Steffin이 망명지인 덴마크로 가져간 칼리다사의 『Śakuntalâ』를 바탕으로 『둥근머리와 뾰쪽머리 Die Spitzköpfe und die Rundköpfe』의 탈고 작업에 사용한 사실이다. 이 탈고에서 브레히트는 서막을 추가시키고 있다. 이 서막에 사용하고 있는 자기소개 기법, 작가의 소개, 작품과 작품의 줄거리 소개기법은 인도의 『산스크리트』극과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상세한 것은 “브레히트의『서사극』과 인도『산스크리트』극 - 서막과 프롤로그 기법의 수용과 발전.「대화」봄/여름 1995 괴팅겐 4-29/11-34 쪽”이란 필자의 논문 참조

    이러한 기법이외에도 아시아 극에서 흔히 있는 산문과 운문의 병열적인 교체로 줄거리 진행을 입체화 시키는 기법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Poetik』을 바탕으로 발전해온 서구극에서 대화로써만 연극의 줄거리를 발전시키는 제약성을 인식했던 세기 변환기의 작가들이 이러한 제약성을 극복하고자 아시아 연극의 “입체화 기법”을 수용하여 서구극에 도입한다. 특별히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메터린크 Maurice Maeterlinck와 중국과 일본에서의 오랜 외교관 생활을 통해 아시아 연극을 직접적으로 접했던 클라우델 Paul Claudel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입체화 기법은 결국 희곡에다 합창단이나 무대감독을 통한 서사적 진행이나 노래나 합창을 통해서 줄거리를 소외시키거나, 다양화시킴으로써 평면적이고 일직선적으로 진행되던 종래 희곡의 줄거리를 서사적이면서 시적인 희곡진행의 확대를 통해 다원적이고 입체적으로 진행시켜 종래연극의 제약을 극복하고 있다.     이러한 희곡형태의 서사적이고 시적인 확대 형식은 브레히트의 작품 중에서도 『코카시아의 백묵원 일기 Der kaukasische Kreidekreis』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물론 이 작품은 브레히트가 “『서사극』중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꼽고 있는데, 이 작품이 무엇보다 다차원적으로 줄거리를 전개․발전시킴으로써 서사극 기법의 완성미를 보여주고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Śakuntalâ』의 서사적 기법과 비교하면, 1500여년전 쓰여진 『Śakuntalâ』속에 브레히트가 『코카시아의 백묵원 일기』에서 추구하고 있는 기법을 칼리다사는 거의 완벽하게 사용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브레히트가 칼리다사의 『Śakuntalâ』를 유고 도서관에 남기고 있지만, 남긴 『Śakuntalâ』자체를 가지고 정확하게 브레히트가 사용했거나 연구한 흔적을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두 작품의 이러한 기법을 비교해 보면 브레히트가 분명하게 『Śakuntalâ』를 통해서 많은 것을 수용하고 발전시켰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브레히트는 『코카시아의 백묵원 일기』에서 희곡적인 줄거리에 『산스크리트』극에서와 같은 가수와 노래를 통한 서사적, 시적인 줄거리 전개를 통해『서사극』기법의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기법을 브레히트는 실제 줄거리와 거리가 먼 장면의 해설이나 서사적인 반전 또는 등장인물의 내적 심경을 표현하고자 할 때, 아시아 극에서 흔히 사용하는 산문체의 줄거리에다 운문체로 된 노래나 시를 삽입하는 기법을 자유자제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다 또 가수의 서사적인 해설을 덧붙여 사건진행에 있어서 종래 서구 연극의 모든 극적인 제약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와 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결국 인도의 『산스크리트』극에 영향을 받아 발전한 중국의 원곡 元曲이나 일본의 노연극 能演劇을 두루 접하고 나서, 브레히트가 아시아 연극기법들을 자신의 연극에 수용하고 혼합해 발전시킴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포르스터가 번역한 『Śakuntalâ』가 괴테와 쉴러를 위시한 독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면면히 이어진 『Śakuntalâ』의 영향은 결국 브레히트에 이르러서 인도의 『Śakuntalâ』, 중국의 『灰欄記』와 『合汗衫』, 일본의 『谷行』에 이어지고 있는 서사적 기법이 브레히트의 『서사극』에 수용됨으로써 서구 연극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칼리다사의 『Śakuntalâ』를 위시한 『산스크리트』극은 아시아 연극의 뿌리요, 근원이다. 그래서 일본 能劇을 집대성한 世雅彌 (Seami)는 그의 『花傳書』의 첫 문장에서 “能劇의 뿌리는 인도에 있으며, 나아가서 중국과 한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世雅彌가 지칭하는 뿌리는 결국 인도의 『산스크리트』극, 중국의 『元曲』, 한국의 『탈춤』이다.


    놀랍게도 브레히트는 이미 아우크스부르크 시절, 중국 작품인 『Mister Wu』를 접했으며, 포이히트방어와 『뮌헨 실내극장 Münchner Kammerspiel』을 통해 타고르 연극과 포이히트방어가 번안했던 인도 『산스크리트』극인 칼리다사의 『왕과 무희 Der König und die Tänzerin』과 슈트라카의 『작은 질저울 Vasantasena』를 접했다. 베를린 시절(1924-1933)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의 번역을 통해 일본 能劇인 Komparu Zenchiku(金春禪竹)의 『谷行 Tanikô』과 중국 元曲 張國平(Tschang Kuo-pin)의 『合汗衫 Ho-han-chan Zwei halbe Mäntel』(BBA 248/1-85)을 접했다. 또 1925년 클라분드의 『Der Kreidekreis』의 공연이나, 이듬해 발간된 포르케 Alfred Forke의 번역 『灰欄記 Der Kreidekreis』를 통해서 元曲을 접했다. 그리고 20년대 베를린에서 접했던 라우크너 Rolf Lauckner와 코른펠트 Paul Kornfeld의 칼리다사의 『Sakuntala』에 이어 덴마크 망명지로 스테핀이 가져갔을 가능성이 있는, 켈러너 Kellner가 번역한 슈드라카의『작은 질저울 Vasantasênâ』과 칼리다사의『Sakontala』를 통해 인도의 『산스크리트』극을 접했던 것이다.




    이들 아시아 연극들을 통해 브레히트는 자신이 추구하고 발전시켰던 모든 서사적인 기법들을 고스란히 수용하고 있는 사실이 아직까지 브레히트 연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흥미롭다. 그 결과로 브레히트가 아시아 극에서 수용한 요소들을 그리스-로마 극, 중세 사육제극과 수난극, 예수회 연극 등에서 찾고자 많은 연구가들이 헛수고를 했던 것이다. 브레히트는 이미 1930년 “유럽이란 문화권은 물론, 그 당시 시대에서는 서사극을 위한 전형을 찾을 수 없고, 단지 아시아 연극에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이제껏 이러한 점들이 연구자들의 ‘동․서양 연극의 동시적 이해’란 어려움 뒤에 단지 깊숙히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서구 연극에 있어서 전환점을 가져오게 했던 브레히트의『서사극』도 일찌기 포르스터의『Sacontala』번역을 통해 괴테나 쉴러에게 영향을 미치고 난 뒤, 면면히 이어져오던 인도 연극의 전통을 전격적으로 수용해서 새로운 현대 사회의 실제적인 문제를 작품에 담은 것이다. 인도에서 기원전 1-2세기 경 바하라타 무니 (Bharata Muni)에 의해 집대성된『Nâţyaśâstra 연극술에 관한 지침서』를 바탕으로 굽타 왕조인 3-5 세기경에 이르러서야 『산스크리트』극이 꽃을 피웠고, 이 때에 칼리다사는 동․서양 희곡문학을 통틀어 걸작으로 꼽히는『Śakuntalâ』와 다른 작품들을 창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산스크리트』극들은 동양에서는 중국 元曲, 인도네시아 그림자 극과 발리섬의 연극, 월남 Cheo-Theater, 한국 탈춤 그리고 일본 能劇을 낳게 했고, 서양에서는 괴테와 쉴러를 위시한 도이취 고전․낭만주의에서 브레히트 연극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시아 연극계는 물론 한국 연극계나 문학계에서 브레히트 연극이론을 무조건 환영하면서 수용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러한 ‘서사적 기법’을 자신들이 발전시켜온 전통 연극과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지도 않고 “브레히트 연극의 기법으로 정의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것”은 동양인들이 “옛 것을 배워 새것을 안다 溫古以知新”라는 진리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 것이리라. 아울러 이러한 모습이 남의 학문을 연구하는 우리의 모습이자, 원형과 뿌리를 잃어버린 채로 “산에 와서 물고기를 찾는” 현재 우리 자신은 아닐는지?  (서구를 움직인 동양의 고전 시리즈 게재 - Göttingen 1995년 겨울, 2014년 가을 온라인 독자를 위해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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