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logos

브레히트 "흔적 지우기/남기기" 기술

최종 수정일: 2022년 11월 22일


- 작가 브레히트의 의도적 흔적 지우기와 연구자/독자들의 오리무중



브레히트는 1930년 총 10 편으로 된 시집 『도시인을 위한 독본』의 첫째 편에서 "흔적을 감추어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흔적을 지워라 (Verwisch die Spuren!)"는 시를 남겼다. 그런데, 시적 자아의 이 자세는 자기 자신 작품들 도처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브레히트는 일반 작가들과는 달리 일기를 남기는 대신에 『작업 일지 (Arbeitsjournale)』를 남기고 있기 때문에, 작가의 작품 생성과 다른 작가들은 물론 이들 작품들과의 연관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철저하고도 꼼꼼하게 창작의 흔적을 남긴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흔적 남기기" 의 철저함 틈새 사이로 브레히트 특유의 "흔적 감추기"도 시도했음을 어렵게 간파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 자신의 의도적인 "흔적 감추기"로 인해 브레히트 연구자들은 엉뚱하고 치우친 주장을 펼쳤으며, 브레히트 100주년 기념으로 동·서독 독문학자들이 공동으로 편집해낸 새전집 (GBA) 해설들에도 이런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작가 브레히트의 자세에 대한 한가지 면을 필자는 "서사극"과 관련해 " 서사극 창시자, 브레히트의 »비웃음«"이란 다음 소네트에 잘 표현하고 있다.



확연한 흔적과 애매한 흔적 동시 남기기

브레히트는 자기 연극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전하고 수용한 이론의 뿌리나 자신이 번안한 작품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사용했던 첫번째 방식은 어떤 사항에 대해 아주 뚜렷하게 흔적을 제시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이 감추고자 하는 근본적인 흔적을 철저하게 감추는 방식을 꼽을 수 있다. 이 방식은 바로 서사극의 참뿌리를 사후 60여년을 꽁꽁 감추는데 성공했던 방식이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찾아가 스승으로 평생 대했던 포이히터방어 (Lion Feuchtwanger, 1884-1958)를 만나는 순간부터 그의 관심은 서사극을 발전시키는 일에 있었고, 이에 긍정적인 동기를 제공했던 스승 포이히터방어는 일찌기 인도 산스크리트극을 번안해 독일 무대에 대성공 시켰던 작가였다. 하지만, 브레히트를 만난 이후로 포이히터방어는 희곡 쓰는 일을 중단한 보기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물론 브레히트는 뮌헨 대학시절 클라이스트 문학상의 수상작인 『한밤중의 북소리 Trommeln in der Nacht』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포이히터방어의 산스크리트극 번안극이 뮌헨에서 공연되는 것을 직접 보았고 이 두 작품 읽었을 뿐만 아니라 포이히터방어로부터 산스크리트극의 서사적 요소에 대해 배웠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작품인 『바알 (Baal)』에서 부터 도처에 산스크리트극의 서사적 요소와 형식들이 이전되고 융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브레히트가 스승 포이히터방어와의 교제를 통해 명확하게 인도 산스크리트극 형식과 관련성에 대한 흔적이 연구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한 것은 1930년 일본 노극 『Tanikô 谷行』을 가지고 교육극 『동의하는 사람』으로 번안한 뒤에 원전을 정확하게 밝힌 사실에 기인한다. 이것으로 인도 산스크리트극과 관련된 뚜렷한 흔적이 지워지거나 연구자들의 관심에서 분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브레히트 연구자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일본 노극의 흔적이 너무나 확연해 연구자들 시야에서 산스크리트 흔적을 전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다음 소네트에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브레히트 »서사극«과 일본 노(能)극에 대해[2]

- 브레히트는 일본극에서 무엇을 배우고 수용했나?


아는가? 브레히트 연구에서 가장 큰 오해와 곡해 남긴 주제인 걸 브레히트 흔적 감추지 않고 스스로 노출했기 때문인 게야. 교육극 『동의하는 사람』 원전으로 『Tanikô 谷行』 제시한 게야. 이제 아는가? 바로 »서사극« 연구자들에게 오해의 덫 되어버린 걸 아직도 모르는가? 그가 “교육극“에만 수용하고자 시도했던 걸 노극 “Nanori 名告“와 “Michi-Yuki 道行“ 기법 수용했던 게야. 자신이 말하고자 하던 걸 방해하자 곧바로 포기했던 형식인 게야. 아는가? 제한적 사용과 포기된 게 »서사극« 대표 형식 될 수 없음을 제아미 (世雅彌) 『花傳書 Kadensho』에 밝히고 있지: 노극의 뿌리 “인도에 있으며 중국과 한국에도 두고 있다“고 결국 동양극 뿌리는 »산스크리트극«이라 할 수 있지. 브레히트 인도극 작가 칼리다사 (Kalidasa) 구체적으로 언급했었네: ‘효과 있는 새 극작술, 즉 »서사극« 창출하는데 이용할 수 있다‘고 결국 노극 아니라 칼리다사 『샤쿤탈라』에 서사적 형식 뿌리가 있었네.


2022년 3월, 봄의 문턱, 독일 검은숲 언저리에서


윗 소네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브레히트 서사극을 정립한 결정적 뿌리가 된 것이 칼리다사의 『샤쿤탈라 Sakuntala』이다. 즉 스테핀이 망명지로 가져갔던 켈러너 (Hermann C. Kellner)의 번역본 『샤쿤탈라 Sakuntala』 (라이프치히, 1890)인 것이다. 즉 덴마크 코펜하겐 공연을 위해 1931년 베를린에서 완성했던 『뾰족머리와 둥근머리』를 『둥근머리와 뾰족머리』로 1934년부터 1936년까지 개작하면서 정립하고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시모다항의 유디트』와 『공자의 생애』에서 구체화되고 발전되었으며 『사천의 선인』에서 집대성된 것이다. 왜 브레히트 서사극의 전형이 일본이나 중국극이 아닌 산스크리트극인지에 대해 필자는 "브레히트 »서사극«과 동양극 전형 - 브레히트 현대 »서사극« 전형된 칼리다사 『샤쿤탈라』"란 7편의 소네트로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3]

그런데, 브레히트는 이 와중에서도 연구자들에게 명확한 흔적지우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1934년 4월 크눗쫀 (Per Knutzon)에게 보낸 편지에서 『둥근머리와 뾰족머리』가 칼리다사의 『샤쿤탈라』가 아닌 “인도 동화 파산타제나처럼 무대에서 작용할 것" (GBA 28, 414)이라 암시함으로써, 스스로 산스크리트극 형식 이전을 밝힘과 동시에 흔적 감추기를 시도하고 있다.



작품 제목과 내용 융합으로 흔적 지우기


두 번째 방법은 상이한 내용을 자신의 작품에 융합해 실제의 흔적을 지우는 방식이다. 이런 방법으로 브레히트가 연구자들에게 성공적으로 흔적 지우기를 시도한 것은 1938년에 쓴 시 『불타는 집에 대한 석가의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 제목을 석가의 비유인 "불타는 집"과 관련있을 것임을 밝힘으로써, 연구자들 관심을 이 비유에 대해 언급한 서구에서 출간된 책에 집중시켰다. 그 결과로 정작 브레히트 자신의 시 내용과는 많이 다른 겔러롭의 불교소설 『순례자 카마니타』의 『철없는 아이 (Das unvernünftige Kind)』란 장에서 엇비슷하게 기술된 ‘불타는 집에 대한 비유’를 출처로 삼았다고 연구자들은 이제까지 한결같이 주장해왔으며 새전집에서도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4]

실제로 브레히트의 시 『불타는 집에 대한 석가의 비유』는 석가의 "불타는 집"에 대한 내용처럼 보인다. 하지만, 『법화경』의 ‘삼계화택유 (三界火宅喩)’와 비교해보면, 비유들에서 설정된 “불타고 있는 집“은 같지만, 내용상으로는 석가가 설법한 ‘삼계화택유 (三界火宅喩)’와는 아주 거리가 먼 내용이다.


브레히트 시 내용 자체는 석가가 어떤 질문들에 대해 답변이나 언급을 회피한 채 침묵을 지키는 무기 (無記, avyākṛta)와 비슷하다. 즉 ‘무기‘란 주로 ‘세계의 무한성과 유한성’, ‘영혼 혹은 생명과 신체의 동일성 여부’, ‘수행의 완성자인 여래 (如來)의 사후 존속 여부’ 등 본질적인 수행과 그다지 관계없거나 실존적인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별로 도움 되지 않는 질문들에 대해 침묵하는 태도를 말한다.

석가 제자 중에 하나인 만동자 (鬘童子, Mālunkya-putta)는 석가가 뛰어난 현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얻기 위해 석가의 제자가 되어 3가지 질문한 내용 중 하나인 “독화살의 비유“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중아함경 (中阿含經), 전유경 (箭喩經)』에서 기술되는 “독화살의 비유“의 다음 내용과 같다.


어느날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말롱캬'라는 이가 있어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은 영원한 것인가, 영원하지 않은가? 우주는 무한한가, 무한하지 않은가?

영혼과 육체는 별개의 존재인가, 별개의 존재가 아닌가? 이런 것들은 커다란 의문인데도, 부처님은 평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이 없으시다.

오늘은 부처님께 이것을 여쭤보리라. 만일 이에 대해 대답을 못하신다면, 부처님을 비난하고 떠나가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말롱캬는 석가모니 부처에게 나아가 아까 생각한 문제들을 말씀드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부처님께서 이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주십시오. 만일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부처님 곁을 떠나겠습니다."

그 때 석가모니 부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말롱캬여, 나는 네가 내 밑에 와서 수행하면 그런 문제를 말해 주겠다고 약속한 일이 없다. 온 것이 네 마음이었으니, 가는 것도 네 마음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알기 전에는 수행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문제를 알기 전에 수행을 해보도 못하고 너는 그냥 목숨을 마치리라. 그건 마치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순간에 그 친족들의 주선으로 달려온 의사가 그 화살을 뽑으려고 하자,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선 안 됩니다. 나는 먼저 이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활이 어떤 활이었고, 이 화살이 언제 누가 만든 것인지 알아야겠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이 화살에 손대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가 그것을 알기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서 죽고 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롱캬여, 세상이 영원하거나 말거나, 우주가 무한하거나 말거나, 생로병사와 근심걱정은 닥쳐오고 있지 않느냐? 내가 이런 문제에 대해 네게 말해준다 해도 네 의심이 그것으로 풀리지 않으리라. 지금은 그런 것을 말할 때가 아니다. 먼저 급한 것은 생로병사를 소멸하는 길이다. 어서 독화살을 뽑아내는 작업이다. 내가 너희에게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그것을 없애야 함을 알고, 그것을 없애는 길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5]


브레히트의 시 『불타는 집에 대한 석가의 비유』에서 브레히트는 비유의 제목은 『법화경』의 ‘삼계화택유 (三界火宅喩)’를 붙였지만, 실제 내용은 『중아함경 (中阿含經), 전유경 (箭喩經)』에서 기술되는 “독화살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결국 브레히트는 두 비유의 융합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중점 “진정 친구들이여, 별로 할 말이 없네. (Wirklich Freunde / Nicht viel zu sagen haben“[6] 를강조해 표현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어떤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나 언급을 회피한 채로 침묵을 지키는 석가의 무기 (無記, avyākṛta)에 놓여 있는 점이다.

브레히트가 자신의 시 제목을 『불타는 집에 대한 석가의 비유』라고 부르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정작 “화택의 비유 (火宅喩)“가 아니라 “독화살의 비유“를 자신의 시에 융합하고 있다. 더 나아가 '형이상학적인 내용보다 '다급한 현실문제'를 빨리 자각하고 해결하라는 석가 가르침에 대해서는 반 (안티테제)을 제시함으로써 이 비유를 자신의 시에 융합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브레히트 연구자들은 브레히트 흔적 감추기에 말려들어 정작 원전인 올덴베르크 교수가 소개하는 "독화살 비유"[7] 를 이제까지 입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을 필자의 『브레히트 동·서 문학 융합』 (서울, 2022년. 19-27쪽)에 상세히 처음으로 밝히고 있다.



작자미상에다 가상 시인의 이름 붙이기


작가 브레히트가 연구자와 독자를 가장 곤경에 빠트리는 흔적 지우기는 바로 가상 시인의 이름을 붙이고서, 자신이 이 시인의 작품을 번안했노라고 올무에 빠트린 일이다. 놀랍게도 브레히트 120주년이 지난 뒤에도 대부분 이 올무에 빠져서 연구자는 물론 독자들이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51년 23번째 『시도 Versuch』에 실린 『장개석 장군 소속 죽은 한 병사에게 건네는 말 (Ansprache an einen toten Soldaten des Marschalls Chiang Kai-Shek)』이라는 다음 시이다.


장개석 장군 소속 죽은 군인에게 건네는 말


사방으로 행진은

그대에게 끝났다네. 지금 그대는 누워있지

네 조각 소나무 널판 틈새에.


그대 분대장의 아주 큰 선심으로

아직도 입고 있구려

아주 얇은 그대 전투복을.


분대장이 긴 삽을 집어 들었네.

하사는 총을 움켜잡았지.

전우 넷은 그대를 들어올렸다.


이들 얼굴은 무뚝뚝하네

그대가 그리 가벼움에도:

가죽과 뼈만.


행렬이 마을 앞에 당도하면

하사는 소총을 장전하고

분대장은 들고 온 전우들에게 삽을 건넨다네.


그리고 상병, 그는 경사면에 앉아

배급쌀 팔아먹을 생각이나 한다.

그게 그에게 고기와 화주가 생길 것이네.

그리고 경사면 너머 하사는

사격자세로 총을 겨누고 있지.


하지만 내 병사 땀 흘리며 땅을 파네

그대 키 크기만한 땅 구멍을.

그리고 이들은 자평하네 일곱 번째 매장을

지체 없이 강물에 던져버렸던

도움 없이 사체가 혼자 떠다니던 걸.


그리고 이렇게 그대 누워있구나, 좌우엔 전우들

그대 아래 전우들과 전우들이

이내 그대 위에도 그리고 몇 주 이내

바람과 비가 그대 뼈를 파내고, 그대들

짧은 생에 자유를 기다렸던

여기 눕기 싫었던 그대들, 사랑하는 친구들

그러면 들개들이 몰려올 것이네

여기에서 그대들을 물고 가버릴. (GBA 11, 264 f.)


이 시의 출처는 바로 1949년 1월초에 비인에 소재하는 스테른 (Stern) 출판사가 출간한 『중국 승리하다 (China siegt)』란 책인데, 비인에 정착한 작곡가인 친구 아이슬러 (Hans Eisler, 1898-1962)가 1948년 12월 29일 동베를린을 방문하면서 브레히트에게 선물한 책이다.[8] 브레히트는 이 책에서 모택동의 시 『중국 찬가 (Chinesische Ode)』를 번안해 『만리장성 상공 비행중에 생각 (Gedanken bei einem Flug über die grosse Maue)』 (GBA 11, 265 f.)을, 그리고 작자 미상의 시 『이제 넌 자유다 (Nun bist du frei)』를 위에 소개한 시로 각각 번안한 뒤에 스스로 발견한 중국식 이름 “Kuan Chao“로 시인 이름을 만들어 게재한 것이다.[9]


우습게도 브레히트가 원전으로 삼아 번안한 시를 제대로 확인함이 없이, 이후 수많은 연구자들이 브레히트가 만들어낸 시인을 중국 문학사에 실존 인물로 알고 밝히려는 헛수고까지 한다. 심지어 서울대 임한순 교수는 “관자오“란 시인 이름과 잡지명까지 한글/한자로 구체적으로 거명하고선, 스스로 의문을 제시하기까지 한다.[10] 이런 점은 브레히트의 흔적 지우기에 브레히트 연구자들이 덫에 말려 든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번역서를 대하는 독자들은 결국 연구자 내지 번역자가 전하는 명백한 오류이며 사실이 아닌 사항을 사실로 믿고 계속 인용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1차적인 책임은 원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작가 브레히트 흔적감추기 덫에 그냥 말려든 연구자나 역자에게 놓여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에 연구자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이 혹 브레히트 흔적 지우기의 결과의 덫이 아닌지, 자신이 브레히트 번역물을 읽으면서 인용하는 내용이 브레히트 역자들이 브레히트 흔적 지우기 결과물을 그대로 전하는 내용이 아닌지 한번쯤은 체크하는 일이 브레히트 작품을 대하는 연구자나 번역자들은 물론이고 독자들 자세여야 할 것이다.



[위의 내용은 주경민의 『소네트로 읽는 브레히트의 문학과 삶』 , 『소네트로 읽어주는 브레히트 시와 시론』과 『브레히트 동·서 문학 융합』 (서울 2022)에 실린 내용들이다.]


[1] 본 소네트는 “브레히트 현대 서사극과 칼리다사 『샤쿤탈라』“ (서울 2020)과 브레히트 120주기 기념 논문 “브레히트 서사극의 참뿌리, 인도 산스크리트 연극“ (Karlsruhe, 2018 그리고 eBook서울, 2019)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2] 본 소네트는 저자의 전자책 『브레히트 서사극과 일본 고전극』 (서울 2019)브레히트와 제아미 - 노(能)극 谷行 (서울, 2021)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본 소네트는 필자의 『소네트로 읽는 브레히트의 문학과 삶』 (서울 2022). 181쪽에 실려있다.

[3] 주경민: 『소네트로 읽는 브레히트의 문학과 삶』 (서울 2022). 163-170쪽 참조.

[4] GBA 12, 369. 1998년 필자의 논문에서 이 비유가 “화택의 비유“ 보다는 “독화살 비유“에 가깝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주경민: 브레히트와 석가.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1998. 122쪽. 또는 필자의 e북 "브레히트와 석가 - Brecht und Buddha". 서울 2019. 참조

[5] 『중아함경 (中阿含經), 전유경 (箭喩經)』

[6] GBA 12, 37.

[7] Hermann Oldenberg: Buddha, sein Leben, seine Lehre, seine Gemeinde. Stuttgart 1881.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질문의 거부 (Abweisung der Frage nach dem letzten Ziel)“ (315-317쪽)

[8] Fritz Jensen: China Siegt. Wein (Stern) 1949과 Berlin (Dietz) 1950.

[9] 23번째 『시도 Versuch』. Berlin 1951. 141쪽과 이에 따른 크높 교수의 해설 GBA 11, 390. [10] 한국브레히트 학회, 『브레히트선집 5, 시』, 263쪽. (서울 2014), 238과 285쪽 비교. 이 시는 옌젠과 그의 부인이 원본 없이 번안한 시로 봐야한다. 이 시의 내용만으로 본다면, 실상 중국에서 괴테 『파우스트』 번역가로 유명한 곽말약 (郭沫若, Kuo Mo-Jo)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곽말약은1937년 중일 전쟁충칭(중경)으로 귀국해 중국 공산당측 문학평론 공작의 책임을 맡았으며 공산혁명의 항일 전선에 참가하여 선전 활동에 종사하는 중 많을 글을 발표하였고, 자신의 글들에서 중국 고대 애국 시인의 말을 따 국민당의 부패 양상을 들춰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옌젠은 자신의 책 끝에다 부록으로 곽말약과 함께 찍은 사진도 게재하고 있다.






조회수 60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