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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30일5분

"칼리다사 - 샤쿤탈라"

2020년 9월 26일 업데이트됨

64번 째 책 "칼리다사 - 샤쿤탈라" (각 사진을 클릭하면 전자서점으로!!)

“샤쿤탈라“ 한국 미래 독자들에게

독일어로 씌여진 게르만족 최초 작품이 한 쪽만 전하는 『힐데브란트의 노래』 (9세기)인 것을 생각할 때, 칼리다사 『샤쿤탈라』는 그 자체로도 인도 굽타왕조 당시 완벽한 문학 이론과 수준이나 극이론은 물론이고 문화, 사회, 철학과 종교관을 훨씬 뛰어넘어 과학기술 수준까지도 가늠할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도문학자가 아닌 독문학자가 200여 년의 독일 인도학 연구 결실을 바탕으로 21세기에 1600여 년 전에 쓰여진 인도 산스크리트 희곡을 감히 번역한다.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1956) 서사극의 동양극과 연관성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오던 역자는 브레히트 현대 서사극의 뿌리를 찾는 가운데, 브레히트가 언급했던 인도 연극과 칼리다사의 족적을 따라 산스크리트극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 칼리다사 『샤쿤탈라』의 서사적 요소가 브레히트 서사극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본 작품을 단순히 연구 목적으로 20여 년 이상 독일어로 읽었던 것을 다양한 번역본들을 바탕으로 인도 연극술에 가장 가깝게 국내 독자들을 위해 『샤쿤탈라』를 한국말로 번역해 온라인 초청강연에서 약속한 대로 출간하게 되었다.

이 작품을 굳이 번역하는 첫째 목적은 브레히트 관련 학자들이나 연극학자들이 서사극을 막연하게 일본 노극, 중국 원곡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식“으로 단정해오던 관점을 구체적으로 인도 산스크리트극, 그것도 칼리다사 『샤쿤탈라』가 그 뿌리라는 사실에 관심을 돌리기 위함이다. 둘째 목적은 대학 시절부터 연극 내지 드라마 언저리에서 글을 써오던 필자가 당연 한국 연극계에 “한국 연극의 서사적 요소가 불교문화의 전래와 함께 우리 연희술과 극문학에 영향을 끼쳤던 뿌리가 바로 산스크리트극일 것“이라는 자극을 주기 위함이다. 독자들이 필자의 이 두가지 목적에도 도달하는 데, 『샤쿤탈라』 번역본은 분명하게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작가 칼리다사 (कालिदास, Kālidāsa)에 대해서는 애석하게도 그리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없다. 문학사적으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인 굽타왕조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작품 이외는 작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름 자체가 말해주듯이 죽음, 파괴와 회복의 여신 칼리 (काली, Kālī)의 시종(Dasa)이었다. 이 일을 통해 비록 정식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출신이었지만,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로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샤쿤탈라』가 세계문학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한 것은 무엇보다도 1789년에 영역해 출간한 존스 (William Jones)와 이것을 1791년 독역한 포르스터 (Georg Forster)를 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번역이 곧바로 당시에 독일 문학은 물론, 유럽 문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던 괴테 (Geothe)와 쉴러 (Schiller)는 물론 유럽 지성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수많은 관련 작품과 번역들을 내놓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40년 산스크리트 원본에 따라 새로운 번역이 이뤄지기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두 가지 관점이 지배하게 된다. 우선적으로 유럽 지성들이 인도 고전 문학에 눈을 뜨게 하는데 선두 역할을 했던 존스와 포르스터의 번역은 그 당시 유럽적 관점에서 “이국풍“, “낯설은“, “자연적인“으로 대표되는 동양 문학에 관심을 일깨우는 정도에 머물게 되었다. 이것은 존스와 포르스터가 자신들 번역에서 일반 희곡의 대사처럼 단순하게 산문 형식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우선 칼리다사와 『샤쿤탈라』는 아주 부자연스러운 순수문학에 머물렀고, 진면목은 작품 자체에 숨겨진 상태로 남았다. “자연적“이란 특성은 계속해서 “동화 같은“ 관점으로, 즉 『샤쿤탈라』의 세계관을 신들과 인간, 그리고 기적과 일상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없는 “시적 세계“로 단순히 일차원적 관점에서 판단했었다.

두 번째 관점은 헤르더 (Johann Gottfried von Herder)가 『샤쿤탈라』에 대한 자신의 논문 “동방나라 연극에 대해 Über ein morgenländisches Drama“ (1793)에서 소위 “서사적 희곡 epsiches Drama“란 개념으로 특징을 부여하는 “비아리스토텔레스적“인 연극술이다. 이런 관점은 이미 세익스피어 연극에서 숲과 왕궁, 비극과 희극을 뒤섞고 하늘과 땅에 이르기까지 줄거리 진행으로 소위 “열린 형식“을 시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쉴러는 『샤쿤탈라』에서 보이는 연극적 갈등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카타르시스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감정 상태 (भाव bhāva)가 사랑, 걱정, 분노, 두려움, 불쾌까지 나아가며, 예술적 공연을 통해 관객에게도 상응된 기분들 (rasa)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쉴러는 일찌감치 “ 『샤쿤탈라』가 극장 공연을 위해 적합지 못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럼에도, 『샤쿤탈라』의 연극적 형식과 요소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벵골어 원본에서 영어로 번역한 존스와 이를 독어로 번역한 포르스터의 영향은 단순히 이렇게 끝나지 않고 독어권에서 수많은 과제를 남기게 된다. 그것이 바로 『샤쿤탈라』를 가능한 작가인 칼리다사의 의도와 인도 연극술인 “나트야사스트라 (नाट्यशास्त्र nāṭyaśāstra)“에 가깝게 번역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번역 작업에서 어려운 점은 『샤쿤탈라』가 산스크리트극 형태들 중의 하나인 나티카 (नाटिका, Nāṭikā)에 따라 씌여졌고 여러 가지 언어는 물론이고 한 단어에 3가지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는 언어를 구사했다는 점이었다.

즉, 샤쿤탈라에서 대사가 운문과 산문, 아리아와 낭독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속적으로 인도 고전문학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와 다양한 인물이 다양한 일상어를 프라크리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언어의 다양한 교체가 문체의 측면에서 겹겹이 내포하고 있다.

독어권에서 이런 점을 제일 먼저 제시한 번역이 바로 1832년 쮜리히 출신이면서 파리에서 동양 문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프랑스어 번역에서 샤쿤탈라를 독역해 출간했던 히르쩰 (Bernhard Hirzel)이다. 40년 전에 다른 두 번역을 이미 구해서 읽고 열광했던 괴테가 히르쩰 번역이 출간되기 전에 한 권을 선물 받고 1830년 10월 9일에 히르쩰에게 답장한 편지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독어권에서는 이런 문제는 1842년 보에흐트링크 (Ott Boehtlingk)가 산스크리트 원문 『샤쿤탈라』를 출간한 이후의 독역들에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극복되게 된다. 그래서 각 번역본들에서 “산스크리트어와 프라크리트어에서 운문으로 번역된 Aus dem Sanskrit und Prakrit metrisch übersetzt“이라고 특별히 명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글번역을 위해 동원된 독어번역본 "샤쿤탈라" (1791-19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자들의 전공 분야나 관심 분야에 따라 번역 작업에서 또 다른 문제를 남기고 있다. 그 점이 바로 칼리다사가 『샤쿤탈라』를 연극술 “나트야사스트라“의 이론에 철저하게 따르고 있음에도, 번역상에서 유럽 전통극 형식에 따라 막과 장을 억지로 구분한 번역과 가능한 원문에 충실해 산스크리트극 형식을 그대로 반영시킨 번역으로 나눠지고 있다. 즉 1852년 마이어 (Ernst Meier), 1853년 로베단츠 (Edmund Lobedanz,), 1876년 뤽케르트 (Friedrich Rückert) 그리고 1877년 프리째 (Ludwig Fritze) 번역본까지는 언어는 물론이고 막과 장의 구별 없이 산스크리트극의 서사적 형식이 번역에서 최대한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런데 1890년 켈러너 (Hermann Camillo Kellner) 번역에서 괴테에게 영향을 끼쳤던 포르스터의 번역을 떠올리면서 다시 산문식 번역을 시도한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서막, 프롤로그와 막간극에 대한 이해 부족에 머물지 않고, 유럽 전통극 형식에 따라 막과 장을 철저히 구분해 번역한 결과로, 애석하게도 산스크리트극 원전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번역이 된다.

이처럼 수많은 번역이 있었음에도 독일 무대 (오페라와 연극)에 올리는 일은 또 다른 어려움을 가졌다. 괴테나 쉴러에 의해 주도되었던 바이마르 공연은 『샤쿤탈라』의 특별한 연극론이 방해가 되었다. 헤르더는 “서사적 희곡 episches Drama“이란 개념 아래, 특별히 셰익스피어 연극을 상기시키는 소위 “열린 형식 offener Form“의 연극술로 새로운 연극의 지평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한참 뒤인 1859년에서야 라우베 (Heinrich Laube) 연출 아래 비인 성극장 (Burgtheater)에서 1852년 번역된 마이어의 번역판으로 『샤쿤탈라』가 마침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이외에도 그루베 (Max Grube) 연출로 쉬레더 (Leopold von Schroeder)의 개작을 1903년 베를린 왕실 극장에, 그리고 1925년 헨켈 (Paul Henckel)의 연출로 라우커너 (Rolf Lauckner)의 『샤쿤탈라』가 베를린 민중무대 (Volksbühne)에 올랐다.

하지만, 1980년 벤네비쯔 (Fritz Bennewitz) 연출 아래, 라이프찌히 극장에서 연극술 『나트야사스트라』를 철저하게 공부한 뒤에 포르스터의 번역을 무대에 올린 뒤에서야 관객은 물론이고 참여 연극인들에게 『샤쿤탈라』의 진가를 인정하기까지는 2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슈베르트 (Franz Schubert)는 오페라 무대를 염두에 두고 1820년에 이미 작곡을 시도했고 미완성곡으로 남겼으나, 1884년 봐인가르터너 (Felix Weingartner)는 실제로 오페라 무대에 올렸다. 그 이외에도 『샤쿤탈라』 사랑 주제는 발레는 물론이고 조각과 영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외 주목할 번역이나 개작들은 브레히트가 서사극 이론을 완성하기 위해 뮌헨과 베를린 무대에 활동하던 시기에 나온 작품들이다. 즉 1919년 푸어만 (Ernst Fuhrmann), 1922년 카플러 (Carl Cappeler), 1925년에 라우커너 (Rolf Lauckner)와 코른펠트 (Paul Kornfeld)의 『샤쿤탈라』가 그것이다.

이 모든 번역과 시도를 바탕으로 브레히트는 1928년 ”새로운 극작술에 대해 (Über eine neue Dramatik)“란 글에서 “아이스킬로스 비극, 몰리에르 희극, 칼리다사 (샤쿤탈라) 등 모든 가능한 연극 양식들을 동원해 근원적으로 효과 있는 새로운 극작술, 즉 『서사극』을 창출하는데 이용할 수 있다“ (GBA 21, 237)고 처음으로 칼리다사의 이름을 언급하며 서사극 창출에 확신한다. 이 짧은 언급을 통해 브레히트는 자신이 『샤쿤탈라』를 접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 이후로 분명하게 산스크리트극에서 서사극 발전에 필요한 형식을 연구하고 실제로 이전했지만, 브레히트 자신은 침묵으로 흔적을 지웠으며 브레히트 연구에서 『샤쿤탈라』와의 연관성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이 내용과 관련 상세한 내용은 2020년 6월 8일자 온라인 초청강연
 
을 정리한 "브레히트 현대 서사극과 칼리다사 '샤쿤탈라' "참조).

한국 연극학계나 연극종사자는 물론이고 연극 애호가, 독자나 관객들은 적어도 앞에서 상술한 독어권에서 『샤쿤탈라』 수용을 위해 겪었던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을 확신한다. 단지 “서사극을 이해하기 원하는 사람은 / 서사극 뿌리를 찾아가야만 한다. / 서사극 원형을 이해하기 원하는 사람은 / 뿌리 “샤쿤탈라“ 세계로 가야만 한다“는 권유로 미래 독자들에게 연구 열정과 남다른 관심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2020 년 8월, 검은숲 언저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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