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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살아남은 자를 위한 소네트

- 번역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한국 민주 발전에 대해


주경민 시인의 새로운 번역

살아남은 자의 분노


나는 물론 안다. 유일하게 행운으로 난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음을. 그런데 간밤 꿈에서 나에 대해 이 친구들이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고 말하는 걸 들었고 난 내 자신을 증오했었지.


(GBA 12, 125. 1942년)


*******


1

그대! 이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시(詩)로 익히 잘 알고 있네.

야만의 시절, 김광규 시인 시와 시집 제목으로 택해 출간했었지.

그 야만의 시절에 브레히트 작품들 아직 금서목록에 속해 있었지

그런 시절 “분노“ 아닌 “한“ 내지 “슬픔“으로 그대들 시심 자극했네.


그런데 말이다! 단지 “슬픔“으로 음미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시(詩)네.

독어 원시 번역하면, 그냥 »나, 살아남은 자«이지.

번역 과정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번역자 묘미 살린 게지

시어 “슬픔“으로 시적자아 시정이 감성적, 소극적으로 변한 것이네.


야만 시절 이후, 그대들 시에서 “슬픔“ 읽으며 빠져든 게야!

그런데 말이다. 브레히트 진정 “슬픔“ 노래한 것일까?

굳이 “분노“라 번역하는 나는 주장하고 싶어: 이건 아니야!


물론 그건 역자, 독자와 해설자 영역에 각각 속하는 건 맞아.

단 4줄 시(詩)지만, 오해 소지 분명 내포하고 있는 게야!

그래서 다시 본 소네트로 해설해 보네, 이걸 점검하고자!



2

먼저 이 시(詩)의 생성 배경 살펴보기로 하세!

알려진 것과 달리, 1944년 아닌 1942년 4-5월 경이지

브레히트가 산타 모니카, 안락한 집에 정착한 시기이지

스테핀이 죽은지 1년 뒤에 쓴 시임을 기억하세!


왜냐고? 1941년 6월 4일 사망 이후 1주기 앞두고 있었네!

그를 모스크바 결핵 병동에 남겨두고 허겁지겁 도망쳤지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 사망 소식 접했지

산타모니카에서 “슬픔“만 노래하지 않았을 것이네.


스테핀 죽은 뒤, 6 편이나 그의 죽음과 관련해 시를 쓴 게야

그런데 정작 1주기날엔 “스테핀 죽은 날“로만 간단히 남겼어!

그리고 6월30일 »작업일지«에 그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 게야.


여기서 브레히트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쓰고 있어!

스테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의 사망 원인을 “히틀러와 배고픔“으로 결론내리고 있어!



살아남은 자의 분노의 주제가 된 스테핀

3

하지만 현실은 히틀러가 여전히 살아 미쳐 날뛰고 있었어.

그리고 스테핀 죽음으로 몰고 간 굶주림이 온세상 뒤덮었지

갖은 시도에도 브레히트는 스테핀 구하는 일에 실패했었지.

스테핀 편안하게 해 줄 그 어떤 능력도 소유하지 못했어.


브레히트, 자신이 성공한 일들 모두 잊을 수 있었어.

하지만 스테핀 구출하지 못한 일 결코 잊을 수 없었지

결국 브레히트 스테핀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지

그래서 이 사실에 분노하며 자신조차 증오하고 있었어.


왜냐면 살아남은 자신도 졸지에 ‘강자‘에 속해버린 게야!

히틀러처럼 ‘약자‘들 죽음 위에 행운으로 ‘살아남은 자‘로 말일세.

그래서 이런 자신조차 분노하며 증오하고 있는 게야!


감성적 슬픔의 차원이 아닌, 자신까지도 증오하고 있네.

시적자아 브레히트는 결국 “의연한 분노“ 표현하고 있는 게야!

여전히 호의호식하는 히틀러 앞에, 극성 부리는 불공정 앞에.



4

그대! 브레히트 시 »슬픔«으로 아직 이해하며 읽고 싶은가?

강한 자만 살아남는 세상과 사회 현실들 앞에서 말일세?

이성적 의분이 아닌 감성적 슬픔에 안주하며 말일세?

적어도 시적 자아, 브레히트가 그대들에게 그건 요구하지 않았다.


번역시 »슬픔«과 야만 시대와 함께 의분 잃고 슬픔을 기쁨으로 누렸다.

갑자기 밀려온 무늬 뿐인 민주주의 도래와 발전 말일세!

브레히트 시와 함께 6월 항쟁과 568세대가 가져온 결과 말일세!

결국 이 기쁨 “세월호 참사“로, 촛불로 이어져 활활 타올랐다.


그대, 이제 슬픔 아닌 의분 되찾아야 하네!

주권자 국민 개, 돼지로까지 폄훼하는 무리들로부터.

촛불에 담긴 그 참뜻 마침내 그들이 알도록 해야 하네!


그대, 배워야 하네! 억척어멈의 마지막 대사에서,

‘민주의 수레‘ 목적지까지 함께 끌어야 하네!

벗어나야만 하네! 자칭 민주, 자칭 공정과 법치란 말장난에서!!



억척어멈 마지막 장면과 살아남은 자의 분노


5

야만의 시대로부터 ‘살아남은 자‘가 슬픔에 안주하는 한,

민주, 공정과 법치는 쉬이 오지 않을 것이네

그대에게 “가만 있으라!“ 끝없이 요구할 것이네

브레히트 시, 공정과 법치 위한 의분으로 읽지 않은 한!!


그대 촛불 승리에 안주하며 기쁨 누리는 동안

야만의 계절이 공정이란 이름으로 다시 달려온 것이네

야만의 계절은 그대를 감성적 슬픔에 잡아둘 것이네

다시금 그대들 가슴에, 슬픔 대신 의분 타오르지 않은 한.


슬픔이란 독약으로 의분 앗긴 채, 거세 당한 반려동물로 전락한 게야!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호된 대가 치르고 있는 게지.

그대, 거세 당한 채로 ‘2대남‘에 이어 ‘3대남‘까지 양산할 셈인 게야?


이해하는가? 왜 더 이상 슬픔으로 읽지말아야 하는지?

잘못된 표현과 언어유희에 더는 침몰해선 안되는 게야!!

시인 주경민, 왜 »살아남은 자의 분노«로 번역 고집하는지?



수레를 끄는 억척어멈 (봐이겔), 1949년 베를린 앙상블


6

살아남은 자의 의분, 히틀러 살아남지 못하게 했다:

부정하고 불의한 무리들의 승전가는 결국 꼬리 내렸지

민중들 전쟁 굶주림과 학살로부터 마침내 해방시켰지

결국 아우슈비츠 만행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33년 2월 27일 의사당 방화사건 다음날 망명길에 올랐다.

이어 5월 10일 다른 책과 함께 브레히트 책도 불태워졌지

이렇게 공식 선거 통해 전쟁과 독일 야만의 시대가 열렸지

살아남은 자로 남고자 각 나라 전전하며 세계 한바퀴 돌았다.


전쟁은 끝나고 브레히트도 베를린으로 되돌아 갔네!

불탄 책 다시 인쇄되고 마음대로 읽었지: 브레히트 책을

그렇게 억첨어멈 끄는 수레는 베를린, 파리, 서울에도 구르네!


분노하는 살아남은 자는 알고 있어: 지난 3월 9일 그대 한 일을!

그대,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빠진 세대, 그 자식들 말일세!

더 힘차게 끌어보자꾸나, 행동하는 양심으로 민주와 공정의 수레를!


(2020년 잔인한 4월에, 독일 검은숲 언저리에서)




5월 출판 예정인 시잡 "소네트로 읽는 브레히트 문학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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