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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로 쓰는 브레히트 시작론 (詩作論)



독일 시인으로서 2300 수가 넘는 다양한 시들을 쓴 브레히트 (Bertolt Brecht)가 스스로 시작론 (詩作論)이나 시론 (詩論) 을 따로 쓴 적이 없다. 다만 소위 『이론서 (Schriften)』라 불리는 사이사이에 서사극 이론을 위시해 다른 비판적, 논쟁적인 글들은 물론 시에 대해 언급한 글들을 볼 수 있다. 『이론서 (Schriften)』에서 시에 관계된 부분을 따로 모아본다면, 그게 바로 브레히트 시이론이고 시작론이 될 것이다.


브레히트 구전집 (GW)에 이어 새전집 (GBA)이 출간된지도 어연 20여년이 지났고, 그 사이에 한국에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하게 브레히트 시를 이념적으로 치우친 해설을 달거나 굳이 이념적으로 이해하려 드는 학자나 독자가 많은 듯 하다. 이런 결과는 물론 그렇게 논문을 쓴 특정 학자들이나 이런 영향으로 브레히트 시를 해설하고자 드는 사람들 영향일 것이라 본다.


필자가 지난 5월에 출시한 소네트 집 『소네트로 읽는 브레히트 문학과 삶』은 그런 흐름에 딴지를 건, 독자들을 위한 책일 수 있다. 즉, 5해에 3해를 뺄셈해 '브레히트 문학과 삶을 계속 그렇게 읽어도 될까?'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도록 유도해보는 작업이었다.


지난 작업에 이어 언제 완성될 지는 모르겠지만, 브레히트가 자신의 이론서에서 시작론에 대해 언급한 글들을 소네트로 따로 담아보기로 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시인들 이성에 대한 소네트

- 시인은 이성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1]


1

작품은 물론 사적으로도 잘 알고 지내는 시인들 여럿 있다네.

그런데, 이들 중 대부분 유독 시를 쓸 때, 멀리하지: 이성적인 걸.

이걸 보고 놀랄 때 자주 있지: 다른 글과 달리 시작에서 태도를

혹 시를 감성적인 무엇으로만 잘못 이해하는 것인가 의심한다네.


혹 이 시인들 순수 감성들 존재한다 믿고 있는지 난 의심하게 된다네.

이걸 믿고 있다면, 알아야 하네: 사고 (思考)처럼 감성도 틀릴 수 있음을

만일 이들 시인들 이걸 안다면: 순수한 감성이 결코 없음을.

그러면 이런 시인들 보다 조심해 이성으로 시 쓰게 될 것이네.


시작 의도가 복된 것이라면 말이야!

그러면 감성과 이성은 온전한 조화 이루게 되겠지?

감성도 이성을, 이성도 감성을 서로 손짓하니 말이야!


시인이 시작 복된 사명으로 여긴다면, 달리 시 쓰겠지?

그런 시인은 감성과 이성 온전히 조화로운 시들 쓰는 게야

이런 시작들 위해 시인의 선택만 오롯이 남겠지?!


2

시를 갓 쓰기 시작한 시인들 너무 걱정들 하는 것 같네.

시정에 빠져 시상이 떠오를 때, 이성적 사고가 이걸 망칠거라고

난 말하고 싶네: 정말 어리석은 걱정들이라고

위대한 시인들 시작 안다면, 그런 걱정들 아예 않을 것이네.


이들 시인들 시작 중에 사려 깊고 이성적 사색 결코 멀리하지 않는다네!

시정이 시창작에 방해될 피상적, 불안정, 쉬이 사라질 정서 결코 아니지

들뜨거나 격앙된 감성적 상태가 명쾌한 사고와 근본적으로 다른 건 아니지

오히려 시작에 이성적 판단 꺼리는 정서가 시정을 비생산적으로 만든다네!


시작에 이성적 판단 기준을 멀리해서는 안되는 게야!

그렇지 않으면 시 쓰는 걸 단념하는 게 낫겠지?

감성도 이성을, 이성도 감성을 서로 손짓하니 말이야!


시인은 이성적 판단으로 보다 더 좋은 시 쓰겠지?

좋은 시인은 감성과 이성 온전히 조화로운 시들 쓰는 게야

이런 시작들 위해 시인의 선택만 오롯이 남겠지?!



(2022년 6월에, 독일 검은숲 언저리에서)

[1]이 소네트는 브레히트 글 “시인은 이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Die Lyriker braucht die Vernunft nicht zu fürchten“ (GBA 22. 133, 1935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DER LYRIKER BRAUCHT DIE VERNUNFT NICHT ZU FÜRCHTEN


Einige Leute, deren Gedichte ich lese, kenne ich persönlich. Ich

wundere mich oft, daß mancher von ihnen in seinen Gedichten

weit weniger Vernunft zeigt als in seinen sonstigen

Äußerungen. Hält er Gedichte für reine Gefühlssache? Glaubt er, daß es

überhaupt reine Gefühlssachen gibt? Wenn er so etwas glaubt,

sollte er doch wenigstens wissen, daß Gefühle ebenso falsch sein

können wie Gedanken. Das müßte ihn vorsichtig machen.

Einige Lyriker, besonders Anfänger, scheinen, wenn sie sich

in Stimmung fühlen, Furcht zu haben, aus dem Verstand

Kommendes könne die Stimmung verscheuchen. Dazu ist zu sagen,

daß diese Furcht unbedingt eine törichte Furcht ist. Wie man

aus den Werkstättenberichten großer Lyriker weiß, handelt

es sich bei ihren Stimmungen keineswegs um so oberflächliche,

labile, leicht verfliegende Stimmungen, daß umsichtiges,

ja nüchternes Nachdenken stören könnte. Die gewisse

Beschwingtheit und Erregtheit ist der Nüchternheit keineswegs

direkt entgegengesetzt. Man muß sogar annehmen, daß die

Unlust, gedankliche Kriterien heranzulassen, auf eine tiefere

Unfruchtbarkeit der betreffenden Stimmung hindeutet. Man sollte

dann unterlassen,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das lyrische Vorhaben ein glückliches, dann arbeiten

Gefühl und Verstand völlig im Einklang. Sie rufen sich fröhlich zu:

Entscheide du! (aus: GBA 22, 133) 이런 텍스트를 그냥 자유롭게 소네트를 쓰보면 다음과 같이도 될 것이다.





선택해야 할 시인 이성에 대한 소네트

- 감성과 이성은 서로 서로 손짓한다.


남달리 시인들은 이성적인 걸 멀리 한다네! 혹 시인이 감성적으로만 시를 이해한 것일까? 아님, 오직 순수 감성만 믿고 있는 것일까? 그리 믿으면, 감정도 사고처럼 틀릴 것이다네. 이걸 인식한다면, 조심스레 시를 쓸 것이네! 시상詩想이 떠오를 때, 이성적인 게 시정詩情을 망칠까? 시인이 시정에 도취해 쏟아 내기만 하면 될까? 위대한 시들을 봐! 감성보다는 이성일 것이네. 보다 더 사려 깊고 비판적 사색을 피하지 말라! 시작詩作을 방해받을 정도로, 시향詩香이 사라지지 않지. 격앙된 시심詩心들, 사고의 명쾌함과 결코 다르지 않을거야. 이성적 판단기준, 시에다 과감히 표현하라! 이게 싫으면, 시 쓰는 걸 단념하는 게 좋겠지? 시작詩作이 축복이면, 감성과 이성은 완벽히 조화를 이룰거야. (2018년 10월 15일, 이성 보다는 감성이 주를 이루는 시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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